#1 미국으로 갈까 영국으로 갈까?
런던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 벌써 6년이 훌쩍 지났다! 돌아올 땐 서른 살 초반이었는데, 벌써 이렇게 나이 앞자리가 조만간 또 바뀐다니....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20대 대학을 다닐 때엔 그렇게도 시간이 안 가더니... 물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잡고 싶다. 근데 그때로 돌아가도 나란 사람의 알맹이가 변한 게 없으니, 또 똑같이 뒹굴거리며 흘려보낼 것 같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돼
딱 30살을 목전에 두고 유학길에 올랐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과 함께 정말 이대로는 더 미룰 수는 없다는 절박감, 더 좋은 곳에서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싶다는 욕심에 유학 사이트를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유학을 생각했을 때 미국을 가장 처음 떠올렸다. 2014년 즈음에 갔던 뉴욕 여행에서 잠깐 들렀던 SVA (School of Visual Arts)에 대해 꽤 호감을 갖기도 했었고, 언젠가 미국에서 일하면 좋을 텐데...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그 외에 CalArts 나 Ringling Colleges 같이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학교도 모두 미국에 있어서, 진지하게 미국 유학을 오래 고려했었다. 미국, 뉴욕,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디즈니, 드림워즈, 픽사!!! 한 번이라도 거기서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에서 짧지만 정말 실망스러운 사회생활을 한 터라, 미국은 좀 다를까...? 싶은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난 출판 그림책, 상업 일러스트에도 큰 관심이 있었다. 사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맨 처음 했던 일이 일러스트레이션 외주였다. 그림 그리는 일이 세상 좋았고, 좋아하는 일이라면 굶어도 상관없다는 패기가 있던 20대... 하지만 여러 클라이언트들의 갑질과 얼토당토 없는 외주비, 무엇보다도 그림 작가를 얕잡아 보는 여러 행태들을 보면서... 계속해야 할지 그냥 때려 칠지, 때려치우면 대체 그림 빼고 남는 게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지, 심각하게 고민하곤 했다.
그림을 안 그린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서 지금까지 그 비싼 등록금을 갖다 바치면서 비싸기로 유명한 예술대학에 4년이나 다닌 걸까?... 그 시간, 에너지, 노력, 그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까 봐, 내가 무가치한 사람이 될까 봐, 너무 무서웠다. 남들은 그냥 일반 회사 다니면서 그림을 취미로 하라고도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애니메이션으로 미국 유학을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단 애니메이션으로 미국에 취직한 다음에, 좋아하는 그림은 취미로 그리면 되잖아? 그러니까, 애니메이션 유학은 내 진짜 취미를 위한 발판이자 도구였던 것이다. 사실 난 애니메이션 보는 건 좋아하지만,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미국이냐 영국이냐
알다시피 미국유학은 엄청난 돈이 들어가서 장학금을 받거나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으면 유학생으로서 공부하는 게 너무 어렵다. 그렇게 어렵게 공부하는 학과가 사실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거라면... 그거야 말로 진짜 돈낭비 아닐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연말에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유학원에 등록을 했다. 거기서 이런저런 상담을 하다가 뜬금없이 영국 유학은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 영국? 런던? 그 우중충한 날씨에 밀크티의 나라? 그때까지 영국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영국에 일러스트레이션 석사과정이 있다는 사실도 잘 몰랐다. 그때가 대략 11월 초였던 것 같은데... 제대로 된 포트폴리오가 없던 그 시기에 킹스턴 대학교 교수님의 인터뷰가 내년 2월에 잡혀있다고 한다.
뭐??? 지금 3개월밖에 시간이 없는데 그때까지 포트폴리오를 만들라고??? 지금 영어점수도 제대로 만들어놓지 않았는데??? 영국은 토플이나 토익이 아니라... 아이엘츠인지 뭔지 뭐 다른 걸로 점수 내던데 그거 맞나?... 하여간 발등에 제대로 불이 떨어졌고, 그때부터 부단히 있는 그림을 긁어모으고, 새로운 그림을 그리면서 포트폴리오를 채워 넣어야 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서, 유학원에서 주선한 교수님과의 면담을 끝마치고, 가까스로 컨디셔널 오퍼(조건부 입학)를 받고 입학을 약속받았다. 그러니까, 학교가 요구하는 아이엘츠 점수를 충족할 때까지, 입학을 1-2년 정도 미룰 수 있는 것이다.
* Conditional offer는 조건부 입학인데, 해당 유학생이 충분히 학교에 공부를 할 실력이 되지만 학교에서 요구하는 어학 성적이 아직 따라주지 못할 때 학교에서 주는 오퍼이다. 그래도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IELTS 점수를 충족시켜서 통과를 받거나, 두 번째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어학 코스 Pre-sessional class를 일정기간 받고 통과를 받거나. 참고로 프리세셔널 코스는 꽤 비싸다!
난 이 요건을 충족할 겸, 영국 현지 생활도 해볼 겸 해서 대략 6-7개월 정도 어학연수를 먼저 하기로 했다. 웃기게도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하신 이모 덕택에 프랑스는 두어 번 가봤지만, 영국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안 가봤으니, 어느 정도 분위기를 파악하고 적응하는 기간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다음 해 8월 말에 영국으로 넘어가서, 테니스 대회로 유명한 윔블던에서 어학연수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유럽, 영국 유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 고생도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