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작가의 하루 일과
마지막 브런치 글을 쓴 지 자그마치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세상에, 반년이나!!
짐작하겠지만 작년 8월부터 계속 일이 몰아 들어왔다. 3년 동안 계약이 되어 1년에 책을 3, 4권씩 만들어야 하는 보드북, 재작년부터 계약했다가 여러 사정으로 연기가 된 그림책 A, 또 다른 그림책 B...
결과적으로 올해는, 보드책 3권에 그림책 A, 그림책 B, 총 5권의 그림책을 그려야 한다. 세상에... 재작년엔 하도 여유로워서 거진 반년동안 휴가도 갔다 오고 창작책 구상도 했었는데 말이다. 본래 1년에 1-2권의 그림책을 그리면서 베짱이처럼 살다가, 정말이지 하루도 안 빠지고 그림을 그리는 건 처음이다. 이걸 어떻게 다 그리지?
즐거운 나의 24시간, 행복한 마감지옥
그렇게 문득 새해부터 정신없이 일하다가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도대체 왜, 왜 이렇게까지 시간이 부족하고 또 부족한 걸까? 그 시간들이 대체 다 어디로 가는 거지? 왜 일해도 일해도, 시간은 부족하단 말인가...
그래서 문득 돌이켜 보았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세상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인데, 나는 대체 어떻게 쓰고 있는 걸까. 매달 크고 작은 마감을 맞이하는 최근의 내 하루를 따라가 보자.
8:30-9:00: 기상
한창 미라클모닝이 유행할 때 억지로 아침 6시-7시에 일어나 봤다가 깨달았다. 난 아침형 인간이 죽어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침에 일어나면 반짝 정신이 들어서 오전 업무는 어찌어찌할 수 있다. 근데 문제는 오후다. 병든 닭처럼 졸고 또 졸고 결국 하루 종일 졸다가 일을 못하는 것이다...
여러 해를 거쳐서, 밤 12시 반-1시에 자고 아침 8시 반에 일어나는 패턴이 가장 최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쩔 수 없는 저녁형 인간의 운명이다.
9:00-9:30: 스트레칭 + 따뜻한 물
작년 과로하면서 목디스크 + 허리 디스크 초기 증상이 갑자기 찾아왔다. 정형외과를 찾아야 하나... 하고 고민하다가 아침에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기로 마음먹고 거의 1년 동안 열심히 하고 있다. 이걸 반복하니 약간 피곤하더라도 심각한 근육통이나 손목 통증으로 번지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추가로 따뜻한 물을 공복에 마셔서 수분을 보충하는 것도 탈수를 예방하는 방법이다. 작업을 하다 보면 가끔 물먹는 것도 깜빡하곤 한다...
9:30-10:30: 아침밥 + 도시락 싸기 + 샤워
내 사무실 근처는 대표적인 맛집 전멸 구역이다. 근처에 싼 분식집과 중국집, 베트남 쌀국숫집이 있어서 여러 번 로테이션해서 돌다가 결국 또 도시락을 싸게 되었다. 물가도 비싸고, 내가 싸서 먹으면 식비도 절약하고 건강에도 좋고... 작업 시간도 아낄 수 있어서 좋다.
겨울엔 보온밥을 들고 다니지만 여름에는 시원한 스텐통에 콜드파스타나 주먹밥을 싸서 먹는다. 봄이나 가을에는 가끔 편의점 도시락도 자주 먹는다! 모아놓고 보니 제법 양이 많다.
11:00 :출근완료
사무실까지는 딱 30분 걸린다. 가자마자 작업을 하는 건 아니다. 대로변 근처라서 공기가 안 좋기 때문에 오자마자 공기청정기를 켜고, 화분에 물을 준다. 그리고 커피나 밀크티를 한잔 마신다.
마감이 없을 때는 출근길에, 혹은 출근하고 나서 근처 청계천을 산책한다. 바쁘지 않을 땐 거의 매일 30분-1시간 정도 천천히 걸으면서 기분전환을 했는데... 추워지고 나서, 바빠지고 나서 잘 나가질 않았다. 도시락을 먹고 바로 작업을 하기 일쑤라서 소화도 잘 안 되는 터라... 이젠 더 시간을 내서 일부러 산책을 하려고 한다.
11: 30: 메일 확인 + 답변 보내기
그리고 메일을 확인한다. 오늘도 메일이 4개 정도 왔다. 각각 3개의 출판사가 동시에 메일을 보낸 것이다. 허투루 보면 안 된다. 보통 첨부파일과 함께 지시 사항들이 있다. 제대로 해석하고 확인하지 않으면 전혀 엉뚱한 해석에 엉뚱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래서 영어로 된 메일을 아주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예전엔 메일 초고를 쓰고 구글로 돌려서 맞는지 확인하고 보냈는데, 요즘 ChatGPT가 있어서 예전보다 매우 세련된 톤으로 수정해 준다. 난 그냥 외국인일 뿐인데... 가끔 원어민인척 하는 한국인이 되는 것 같아서 좀 머쓱하다. 물론 챗지피티가 늘 좋은 결과물만 내는 건 아니므로 다시 한번 체크는 필수다.
12:00 - 7:00: 그림 작업
그림 삼매경의 시작이다. 그림작업은 정말... 절대적인 시간의 양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들인 시간만큼 퀄리티가 나오는 게 그림책 작업이다. 이 과정을 어떻게든 단축해서 효율적으로 해보려고 했는데... 급하게 그린 그림은 어떻게든 티가 난다. 결과물을 받아보면 안다. 내가 정직하게 했는지, 그저 꼼수만 부렸는지...
보통 구글 타이머를 써서 최소 50-55분으로 맞춰서 시간이 다 될 때마다 10분-15분 정도 휴식한다. 이런 뽀모도로 기법으로 보통 25분을 맞추고 5분을 쉰다던데... 그림작업은 호흡이 아주 길어서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50분을 맞추는데... 시간을 잊고 그리다 보면 50분은커녕 한 시간 반이 지나 있기도 하다.
중간중간 과자나 간식도 먹고 열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진다.
7:00 - 8:00: 저녁 식사
바깥에서 먹기도 하고 도시락을 싸서 먹기도 한다. 너무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 특히 도시락을 많이 싼다. 30분 정도 열심히 먹고 나서 30분 정도는 사무실에서 간단한 운동을 하거나, 그냥 유튜브를 보면서 쉰다. 인스타나 스레드에 들어가서 다른 작가들은 뭐 하나 구경도 하고, 커뮤니티 글을 보면서 열심히 타임킬링을 한다.
8:00 - 10:00 or 10:30 : 작업 후 퇴근
또 그림을 그린다. 이젠 남은 시간도 별로 없어서 오전보다 더 바짝 긴장하게 된다!
보통 사무실에 오면 마감이 빼곡한 달력을 확인한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대충 이면지로 만든 메모지에 적어놓고, 하나씩 지우면서 목표를 달성한다. 그렇게 하나하나 끝내놓고, 마지막 항목까지 완전히 지우고 난 이후의 그 쾌감이란...
그렇게 오늘의 리스트가 적인 메모지를 접어서 갈가리 찢어버린다. 후련하게 휴지통에 던지고, 모든 불을 끄고 마지막 점검을 하고 집에 간다. 이미 밤이 깊어있다.
10:30 or 11:00 : 눈찜질 + 마그네슘과 비타민 D
하도 눈을 많이 쓰는 데다 건조한 겨울 날씨 때문에 안구건조증으로 많이 고생했다. 그래서 최근에 루틴으로 삼은게 있다. 바로 눈찜질이다.
팥으로 만든 안대를 전자레인지에 30초 정도 돌린다. 적당히 뜨거워진 안대를 눈에 대고 10분-15분 정도 눈을 쉬어주면 힘들었던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다! 눈꺼풀의 기름이 배어 나오면, 블레파졸이라는 눈꺼풀 청결액으로 꼼꼼히 눈꺼풀을 청소한다. 이런 루틴을 만들고 나니, 인공눈물을 넣는 횟수가 훨씬 줄어들었다. 눈이 훨씬 편안해진건 덤이다!
여기에 더해, 마그네슘과 비타민 D를 매일 밤 섭취하고 있다. 그전에는 이런저런 마감 걱정 + 근심 괴로움에 정신적으로 힘드니 몸도 많이 힘들었다. 그러니 당연히 잠도 제대로 못 잤다. 하지만 마그네슘과 비타민 D를 꾸준히 먹고 나니 수면의 질이 좋아지고, 잠을 잘 자게 되니 마음도 좀 더 평온해졌다. 에휴 그냥 대충 하자 뭐 어떻게 되겠어... 이런 마음으로 좀 더 어깨에 힘을 빼고 다니게 되었다. 그래, 마감이 좀 늘어나도, 설령 마감을 잘 못 지킨다 하더라도 어차피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잖아?
12:30-8:30 : 취침
세상에 너무 재밌는 게 많다. 못 본 숏츠랑 유튜브 영상도 보고 최근 뉴스도 챙겨보고, 도서관에 반납하기 전에 책도 다 읽어야 하고... 그렇게 여기저기 뒤적거리다 보면 12시가 훌쩍 넘거나 1시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최소 하루 7-8시간의 수면시간을 유지하려고 한다. 잠을 줄이는 것은 미래의 수명을 앞당긴다는 말도 있다. 무엇보다, 난 정말, 정말 자는 게 너무너무 좋다! 세상에서 제일 좋다!
내일은 저녁에 뭘 먹을까, 무슨 도시락을 싸갈까... 궁리하면서 꿈나라로 한다.
그리고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게 내 월요일-금요일까지의 평일 루틴이다. 참고로 평일 휴일까지 포함이다.
아마 직장인들은 매번 법정공휴일은 회사에서 챙겨주겠지만, 프리랜서를 그런 것도 없다. 마감이 닥치면 주말에도 와서 일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공휴일은 한국과 다르다. 그래서 설날이나 추석 때 가끔 나 혼자 나와서 일했다... 정말이지, 명절 휴일엔 거리에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혼자 사무실 나오기 억울할 땐 집에서 재택을 하곤 했다. 그래도 사무실에서 바짝 긴장하고 일하는 게 더 좋아서, 결국 이틀 정도 일하다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거나 근처 스터디 카페로 가곤 한다. 기동성이 좋다는 게 프리랜서의 장점이기도 하니까.
이렇게 따져보니 11시간이나 밖에서 일하다가 오는데.... 대체 왜 시간이 부족하고 또 부족하단 말인가. 불가사의하고 또 불가사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