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광주, 봉하마을 1박2일 취재후기
검은 양복과 검은 넥타이 차림, 흰 장갑을 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비를 맞은 채 10분이 넘도록 제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에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윤 후보는 우산도 없이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습니다. 추모곡에 맞춰 묵념을 마친 윤 후보는 양복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350자 분량의 A4용지 한 장 짜리 사과문을 꺼내 읽었습니다. 종이가 빗물에 젖어 흐물흐물해졌지만 윤 후보는 마치 마이크를 잡은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제압했습니다. 그의 목청에 반대자들의 항의가 묻힐 정도였죠. '전두환 옹호 발언'으로 질타를 받았던 윤 후보가 10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역에서 사과하면서 보인 모습이었습니다.
윤 후보의 광주, 목포, 봉하마을 방문 1박 2일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KTX 안입니다. 윤 후보를 이틀간 동행하면서 그를 지지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가 극명하게 나눠지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윤 후보는 '강한 권력 의지'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그의 광주 방문 역시 반대자들의 항의를 뚫고 사과를 강행했다는 말이 적합할 정도로 강한 목적지향적 이벤트였습니다. 지지자들에게는 강한 확신을, 반대파에게는 극단적 비토를 낳는 행보죠.
윤 후보는 10일 5.18 묘역에서 수백 명의 반대자들이 운집한 가운데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준비된 일정과 메시지를 소화했습니다. 멘탈이 강한 정치인들도 보통 이처럼 강한 반대가 눈 앞에 펼쳐질 경우 살짝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윤 후보는 오히려 더욱 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여러 정권에서 핍박을 받고도 검찰에서 수년간을 버틴 강한 멘탈의 실체를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정치인이라면 의례적으로 지지자와 반대자, 카메라 기자들이 뒤엉켰을 때 사고를 우려해 "넘어지니 조심하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윤 후보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뚜벅뚜벅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주위의 환경에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태도처럼 보였습니다. 경찰 18개 중대 1200여 명의 경호를 받아 저지를 뚫으면서 말이죠. 윤 후보는 시민들의 반대에 막혀 끝내 추모탑에 이르지 못하고 광장 중간에서 사과문을 읽었습니다. 글머리에 썼듯 강렬한 이벤트였습니다.
사과를 마친 윤 후보는 홀가분한 모습이었습니다. 윤 후보는 취재기자단이 타고 있던 버스를 잠시 멈춰 세우고 차에 올랐습니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습니다. 평소 윤 후보와 대화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한 기자들이 식사자리를 요청하자 "제가 술사는 거 참 좋아한다"면서도 "선거법 문제 때문에 쉽지 않다"며 웃음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박 2일 동안 윤 후보가 전달한 메시지는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광주에 가서는 '전두환 옹호' 발언을 사과했고, 전남 목포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 통합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 있는 봉하마을을 찾아서는 노 전 대통령의 서민적 풍모를 높이 평가했죠. 상대 진영 지도자를 칭송하면서 국민의힘 경선 과정에서 '강성 보수' 이미지를 희석하는 잘 짜인 메시지였습니다.
윤 후보를 극렬히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소위 '국민 통합 행보'가 쇼를 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윤 후보가 정치권에 들어온 이후 전두환 옹호 발언뿐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 “손발로 노동을 하는 것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 "없는 사람은 부정식품보다 아래도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등 논란이 될 말을 일삼았습니다. 갑의 입장에서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본인의 입으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국민 통합을 외치는 걸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윤 후보가 국민 통합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로 보수 진영의 대선 후보 자리까지 꿰찬 그가 또다시 정치 보복을 앞세운다면 한국 정치는 심각한 퇴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갈라진 국민의 마음을 모으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윤 후보가 그에 적합한 인물인지는 유권자마다 판단이 다르겠지만요.
윤 후보가 그간의 실언을 뛰어 넘어서 진정한 국민 통합과 정의를 이룩하는 지도자가 되려면 우선 당 선거대책위원회 구성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선대위는 윤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청와대와 내각을 어떻게 꾸릴지 미리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죠.
윤 후보가 선대위 구성을 통해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경선 때 윤 후보 캠프에 소속된 인물의 다수는 친이-친박계 출신입니다. 여기에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세력이 일부 가세한 모양새죠. 중도층, 청년, 수도권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도로 새누리당'을 연상시키는 그림이었습니다. 국민의힘 내에서도 본선 후보가 됐으니 중도층 지지 확장을 위해 캠프의 물갈이와 함께 신규 인사를 영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기존 윤석열 캠프 인사들은 이에 완강히 저항하는 모양새지만요.
윤 후보가 이러한 당내 갈등을 과연 어떻게 해결하고, 국민들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최근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윤 후보가 4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대세 후보가 될지 여부가 캠프 물갈이에 달렸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