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이야기
아빠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그런데 그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다 보니 말이 세다. 말을 좀 둥글리면 좋겠는데, 직설적인 화법이 굳어지다 보니 바뀌는 게 쉽지는 않은가 보다. 그래서인지 부탁한 일은 못 이기는 척 다 해주면서 뒤에 미운 말 한마디를 꼭 보태어 해준 공을 날리곤 한다.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는데, 아빠는 그런 요행을 바라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이 아빠가 정직하게 살게 하는 원천인 건가.
어릴 적 내게 아빠는 호랑이 같았다. 아빠는 본인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무엇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았다. 가족 여행을 갈 때면 오빠와 나는 큰 소리로 재잘대거나 싸우기 일쑤였는데, 그럴 때면 운전하던 아빠는 정신이 사나웠는지 우리를 두고 보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레이저 쏘듯 이글거리는 눈빛과 함께. 한바탕 큰 소리가 들리면, 오빠와 나는 쥐 죽은 듯 조용히 있다가 잠에 폭 빠져 들곤 했다. 지금이야 오빠도 나도 모두 어른이 되어 '아빠가 그랬었지' 추억하며 깔깔 웃지만, 그 때의 나는 고집스러운 아빠가 퍽 싫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나는 아빠의 고집스러움을 꼭 닮았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엄마보다 딸인 내게 더 조심스럽다. 아무래도 유한 엄마보다 고집쟁이 딸을 이기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듯 하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영악한 나는 아빠에게 곧잘 대적한다.
하루는 부모님은 설날 친할아버지 산소에 가는 일을 논의하고 계셨다. 가만 듣고 있던 나는 아빠에게 이번에는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계신 평화의 숲에도 오랜만에 한번 들르자 말했다. 아빠는 그 말에 아무 답변도 하지 않으셨다. 평소 친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아빠는 친가에 관련된 일이라면 당연하다는 듯 엄마와 동행했다. 바늘이 가면 실이 가는 거 아니겠냐며. 하지만 아빠는 외가 일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무심했다. 나는 친가와 외가 모두에게 잘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늘 외가에 대한 아빠의 무관심이 못마땅했다.
답답했던 난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내가 시집갔는데 남편이 우리 집에 잘 오지도 않고, 신경도 안 쓰면 엄청 섭섭하지 않겠어?” 아빠는 이렇게 답했다. “여자는 출가외인이니까 당연히 시댁에 신경 써야지. 뭐가 그렇게 섭섭해?” 그렇게 자기중심적이고 보수적인 아빠를 나는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창옥쇼 리부트’라는 프로그램에 ‘기 센 남편이 힘들다’는 사연이 나왔다. 남편이 항상 자기 말이 다 맞다고 우긴다고 했다.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도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며 옆에 앉은 남편을 대놓고 디스하는 아내 분 모습이 엄마와 겹쳐 보였다. 순간 TV를 함께 보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고, “완전 아빠랑 엄마 같다”며 웃었다. 처음에는 웃으며 사연을 보던 나는 남편 분 이야기를 듣다가 눈물을 왈칵 쏟았다. 남편 분의 사연이 우리 아빠와 참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적 부모와 오랜 기간 떨어져 지냈고, 기댈 곳 없었던 본인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한다는 믿음에 고집이 세진 것 같다는 그분의 말이, 꼭 아빠의 속마음을 엿듣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아빠는 초등학생 때부터 거의 성인이 될 때까지 나의 외증조할머니, 즉 아빠의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할머니는 온 정성과 사랑을 쏟아 아빠를 키웠다. 아침마다 따끈한 밥을 지어 먹였고, 옷은 항상 정갈하게 다려 입혔다. 그럼에도 부모님의 부재를 완전히 채울 수는 없었다. 어릴 적 아빠는 아버지로서 혹은 남편으로서의 할아버지를 거의 보지 못한 데다, 가끔 뵈었던 할아버지는 너무나 짱짱하고 무서우셔서 가까이하기 어려운 분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 여자의 남편이, 두 아이의 아빠가 된 그에게는 기댈 구석이 없으니, 자신이 더 단단하게 서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꼿꼿한 긴장과 강박은 내 말이 틀린 걸 인정하면 그의 모든 게 무너질 것처럼 느껴졌겠지. 그렇게 매 순간 누군가에게 기대지 못하고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니 처음으로 아빠가 참 짠했다.
아빠는 엄마와 달리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다. 특히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더더욱 내색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의 힘듦을 꾹꾹 눌러내는 데 익숙하다. 아빠가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던 시기가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잠에서 깬 엄마가 불빛을 따라 거실로 나와 보니, 아빠는 멀거니 창문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참 쓸쓸하고 고되어 보였단다. 아빠는 그 앞에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위 글과 연결된 글이 읽고 싶으시다면,
1. 나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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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엄마와 천천히 화해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