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묵밥을 참 좋아한다. 국물을 따뜻하게 해서 먹어도 맛있고, 차갑게 해서 먹어도 맛있다. ‘묵밥에 국물이 들어간다고?’라고 생각한 분이 있을 것 같다. 우리 집에선 밥은 따로 안 들어가고 묵과 채소, 김치, 김, 국물이 들어간 묵사발을 묵밥이라고 불렀다.
사실, 묵밥은 흔히 접할 수 없는 음식이다. 묵밥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많이 먹었다. 엄마가 대용량으로 음식을 만들 때 쉽게 만들어 줬던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맞벌이였던 부모님은 자식들이 식사를 거를까 봐 종종 대용량으로 음식을 해주셨다. 주로 카레나 곰탕 등이었다. 이런 음식을 한 번 하면 보통 3~5일, 길게는 일주일 동안 먹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빨리 질렸다. 3~5일이 넘어가면 그 음식은 보기도 싫었고, 냄새도 맡기 싫었다. 그런데 묵밥은 아니었다.
묵의 쫀득함과 육수의 짭조름하면서도 시원함, 새콤하면서도 고소한 김치 무침과 밥도둑인 김, 볶은 당근과 볶은 애호박, 오이 특유의 비린내를 안 나게 살짝 볶은 오이와 계란 지단 등의 조화가 참 좋았다. 일단 식감이 너무 좋다. 쫀득한 묵의 식감과 살짝 볶아서 아삭과 물컹의 중간 단계인 채소들과 아삭한 김치를 같이 먹으면 입안에서 식감이라는 여러 폭죽이 터진다.
맛도 조화롭다. 도토리묵의 심심하면서도 약간 떫은맛에, 새콤하면서도 약간 매콤하고 참기름으로 양념해 고소한 김치와, 알맞게 익혀 달짝지근한 채소들, 담백한 계란 지단과 김의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한 맛. 이런 재료만 먹어도 참 맛있는데, 육수에 따라서 맛이 조금 달라진다. 여름에는 동치미 육수를 사용해서 새콤하면서도 시원한 맛을 더하고, 겨울에는 멸치와 디포리(밴댕이), 무 등으로 만든 육수를 넣어 따뜻하면서도 깔끔한 감칠맛을 더해주면 더욱 맛있다. 이 조합은 몇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한테 묵밥은 계속해달라고 했다.
성인이 된 지금 묵밥을 해서 먹으려고 보니, 이게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간단하게 도토리묵과 김치, 동치미 육수, 육수 티백을 마트에서 사서 해 먹었는데, 그때 해줬던 맛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묵밥을 어떻게 해줬는지 돌아보았다. 생각해 보니 도토리묵을 만드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도토리를 간 가루에 물을 넣는다. 처음엔 센불로 끓이다가 끓어오르면 중약불로 줄여서 되직하게 될 때까지 계속 저어준다. 그리고 실온에서 굳혀준다. 되직하게 될 때까지 안 타도록 계속 저어주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냉장이 아닌 실온에서 굳혀줘야 하므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채소를 알맞은 식감대로 볶는 것, 이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채소를 사서 다듬고, 먹기 좋게 자른 뒤에,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아야 했다. 양이 많다 보니, 어떤 건 잘 익고 어떤 건 덜 익었을 수 있으므로 잘 저어가며 알맞은 식감이 될 때까지 익혀야 한다. 딱딱한 당근과 약간 부드러운 애호박의 볶음 시간은 다르므로 신경을 써줘야 한다. 가장 어려운 건 오이었다. 오이 비린내가 나면 잘 못 먹는 나를 위해서 엄마는 오이를 약간 볶아주셨다. 오이는 수분이 많으므로 정말 빠르게 익혀야지만 식감을 살리면서도 비린내는 안 나게 먹을 수 있었다.
육수 또한 손이 정말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동치미 육수는 동치미를 담가야지만 먹을 수 있었다. 따뜻한 육수를 내기 위해서 정말 많은 재료와 시간이 필요했다. 멸치와 디포리(밴댕이), 가스오부시(가다랑어포), 무, 대파, 양파 등을 넣고 푹 끓여줘야 한다. 그러고 나서 간을 맞추고 건더기를 다 건지면 비로소 육수로 사용할 수 있었다.
아마 묵밥을 좋았던 건 나와 동생이 기쁘게 먹을 생각을 하며 정성스럽게 요리하던 엄마의 애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따라 엄마의 애정 담긴 묵밥을 더욱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