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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애 Nov 17. 2022

이름을 부르는 행위의 의미

<명명하기와 자기인식>

우리는 모두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하죠.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자신이 맡고 있는 역할로서의 이름, 친구들이 부르는 별명, 연인이 불러주는 애칭, 그리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가치로서의 이름이 있습니다.

어떤 명칭으로 무엇을 부른다는 행위는 그 의미를 마음에 아로새기는 일입니다. 부모님이 나를 이름으로 불러준다는 건 '너의 존재를 내가 기억하고 있어'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서로를 애칭으로 부른다는 건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부여한 명칭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명칭에는 내가 나를 어떤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즉 자존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쓰레기', '멍청이', '모자란 놈', '불효자',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나약한 놈', 이런 이름으로 자기도 모르게 부르곤 합니다. 스스로를 이렇게 불러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스스로에게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을까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잔인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수험생들이 지금까지의 노력을 모두 쏟아붓는 수능이 있었습니다. 후련한 마음으로 시험장을 나온 학생도 있을 테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결과가 따라오든 모두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타인이 전하는 위로의 말 이전에, 학생들 스스로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번 수능이 끝나고 나서도, 분명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이름을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내가 그렇지 뭐'라고 생각하며 자신은 부족하기만 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고, 수능을 망쳤으니 인생도 끝났다고 좌절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대단한 사람들만 겨우 입학할 수 있다는 하버드 대학에 진학하고서도 자퇴하고, 그 후 큰 성공을 거둔 유명인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대 입학만이 성공의 척도가 되지 않는 상태가 된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다면 당연히 슬플 겁니다. 한탄스럽겠죠. 그러나 결코 그게 끝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죠.

정말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곤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본격적인 '스스로의 삶'을 시작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그늘 아래, 학교의 그늘 아래서 성인이 될 기회를 기다리고만 있죠. 수능은 진짜 나의 삶을 시작하라는 신호탄과 같습니다. 출발선입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드디어 진짜 삶이, 학생 여러분 자기 자신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출발선에 서서 달려보지도 않고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슬프고 힘든 일이 생겨도 그로 인해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가 숨어있습니다. 물론 이 가치를 찾는 건 쉽지 않아요. 지금 당장의 부정적인 감정의 힘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죠. 감정은 우리 눈을 가리고, 우리는 감정만 보느라 주변에 흩어져 있는 가치를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일단 스스로를 응원하고, 용서하고, 위로해 주길 바랍니다. 감정이라는 안개가 걷힐 때까지 여유를 갖고 기다려보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수고했다고, 결과와는 상관없이 열심히 했다고, 앞으로도 힘내자고, 스스로에게 꼭 말해주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떤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나요?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서, 어떤 이름으로 불리길 바라나요? 남에게 바라는 걸 먼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를 진심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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