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없는 철학자 Jun 30. 2023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문철환콜 프로젝트 그 열한 번째 이야기 <에로티즘>

 "그 수많은 생물 중에 인간이라서 참 다행이야 돌덩어리로 태어났다면 이리저리 치이고 굴러 떼굴떼굴 떨어지고 말 텐데 생명이란 건 참으로 신비해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Jump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신기해 팔다리가 앞뒤로 막 움 움 움 움직이는 게 숨 크게 들이쉬면 갈비뼈 모양이 드러나는 것도 내쉬면 앞사람이 인상 팍 쓰며 코를 쥐어 막는 것도 놀라와 놀라와 놀라와 Let’s dance! Dance"

악동 뮤지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중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아직 오후밖에 되지 않은 필지가 돌아다닌 동선에서만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생활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헬스장에서 한쪽에만 에어팟을 끼고 열심히 유산소를 하는 남자, 독서실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동그라미를 그리며 경보하는 학생도 있었고 강아지를 쫓아서 짧은 두 다리를 앞쪽으로 힘껏 내지르는 아이도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삶의 활기를 알려주는 듯해서 기분이 한 껏 좋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까만 기계 위에서 달리는 행위-독서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행위-해맑게 달리는 행위를 포함해서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악동뮤지션의 노래 가사처럼, 인간은 한낱 저 들판 위의 돌멩이와는 다르다. 사람들은 아무런 목적성 없이 단순히 환경에 의해서 이리저리 치이거나 굴러다니지 만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각각 움직이는 데에는 그만한 나름대로의 이유나 사연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취함에 있어서 그 이유를 '에로티즘'과 관련하여 알려준다. 그리고, 육체-심정-신성으로 구분되는 3가지 에로티즘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특정 현상이나 문화에 대해서 왜 특정한 흐름을 취하는지를 함께 이야기해보려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행동을 취함에 있어서 그것이 어떤 욕구 때문에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지를 공유해 보겠다.   



다음은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조심스럽게 다루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즉 위반하고픈 욕구를 가진 3가지 대상이다. 


1. 죽음에 대하여 


"인간은 자연의 극단적인 폭력에 아니라는 대답을 한 적이 없다. 그저, 기력이 다하면 죽음이라는 자연의 충동에 조용히 눈을 감을 뿐이다"


'육신을 함부로 다루지 마라' '살인하지 말라'라는 금언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인 동시에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가장 근본적으로 여겨지는 규칙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런 규칙은 인간의 어떤 생각으로부터 기인한 것일까? 이에 대해 바타유는 이러한 규율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관계한다고 이야기한다. 

바로 '폭력'을 기피하는 특성이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과거 인간의 삶에는 아직 법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규범이나 규칙이 존재하지 않았을 시기가 분명 존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르주 바타유는 노동하는 인간들은 폭력을 거부하는 경향을 띠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폭력이라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들 노동의 효율성이 감퇴되는 것이 그중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가장 불가사의하면서도 비효율을 가져다주는,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가 바로 '죽음'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사실 이중적인 의미로 인간에게 다가오게 된다고 말한다. 즉, 사실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죽음에 다가가지 못하면서도 어떠한 무서우면서도 엄숙한 무언가가 우리를 현혹시킨다는 것이다. 

그럼 폭력의 상징인 죽음이라는 대상은, 도대체 어떠한 특징을 가지길래 우리 인간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었을까. 그 답은 불연속적인 특성을 띠는 인간의 결핍에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 어떠한 것도 영속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과 관련된 그 어떠한 실체나 개념, 속성도 영원성을 띠고 유지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죽음'은 확실하지는 않아도 그 개념 자체로 연속성을 드러낸다. 이는 종교적인 것과도 연결되어 신성의 에로티즘적인 측면과도 결부될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을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적어도 죽음이라는 개념은 우리를 그 끝없는 바닷속에서 유랑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즉, 불연속적인 삶 속에서 불안과 고뇌를 겪는 인간은 죽음이라는 무지의 대상에 대해 연속성이라는 임의성을 마음대로 부여하고, 그것에 대해서 에로틱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거다. 



2. 성행위에 대하여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육체적 결합과 심정적 결합을 이루면 불연속적인 그들이 완전한 융합에 이르고, 그러면 그들이 연속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성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위나 다가감에 있어서 굉장히 조심스러워한다. 더 세게 말하면, 이성의 무엇을 탐하는 것을 일종의 금기로 여긴다. 사랑하는 연인(혹은 단순 이성)과의 육체적 에로티즘은 끊임없이 인간을 유혹하면서도, 그 자체로 숨 막히는 폭력의 진상을 동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썸을 타는 현대의 수많은 한 쌍들을 보아도 그 양상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불연속적 상태에서 벗어나 연속성을 찾아 나서는 모습을 보인다. 비록 그 음란한 느낌이 금기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그럼에도 그 비밀스러운 행위를 통해서 육체는 연속성을 향해 내달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융합의 물결 속에서, 자아에 대한 소유권 상실이 이뤄지며 에로틱한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된다. 나체 상태는 자신을 내어놓는 것에 대한 표지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에로티즘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안정된 형태의 와해, 다시 말해 현재의 뚜렷한 우리 즉 개인들의 불연속적인 질서를 떠받쳐 주는 사회적 삶의 와해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육체적-심정적 결합을 이루면 불연속에서 탈출해 완전한 융합에 이를 것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가오는 연속성은 허상에 불과한 것. 연인 사이의 열정은 피상적으로 보면 언제나 우연한 조건에 좌우되는 그럴듯한 연속성의 협약 추구인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불가능의 추구였던 것이다. 


3. 그리고, 살해에 대하여 

"잔인성과 에로티즘은 금기의 한계를 벗어나기로 한 사람의 정신 속에 똬리를 튼다"


앞서 우리는 죽음과 성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죽음과 관련된 금기와 마찬가지로 살해와 관련된 금기들에 대한 위반의 흔적도 꽤나 오래전부터 진행되었다. 이는 성에 관한 금기와 위반의 흔적이 역사 시대부터 진행된 것과는 대비되는 것. 

살해를 알기 위해서 (특히 인간 사이에 자행된 살인) 우리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형태의 현상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전쟁은 일종의 폭력이자, 제한이 없는 폭력 양상을 띠곤 한다. 특히 인간의 전쟁은 동물들의 그것과는 달라서 동물로서는 불가능한 잔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적군의 집단 학살을 수반하는 전투는 인간이 저지르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전쟁의 양태를 가장 잘 알려주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포로들을 고문하고 죽이며 심지어 굶어 죽이기까지 한다. 

... 뜨거운 불길에 그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몸부림치면, 구경꾼들은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웃음을 터뜨린다.'


위의 사례와 같은 폭력은 위반을 통해서 생각해 보면 그것을 조직하는 사람과 연결되는 일이다. 즉, 잔인성은 조직적 폭력의 한 형태인 것. 잔인성은 에로티즘과 필연적 관계를 가지지 않음에도 위반에 의해 조직되는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치, 술을 먹어 이성적 사고를 벗어난 사람이 다른 금기를 보다 쉽게 위반하는 것처럼 인간도 잔인성에 있어서 그 한계를 넘어서면 그것을 에로틱하게 느끼는 것은 점점 더 쉬워진다고 분석되는 사실은 놀랍기까지 하다. 

  


에로틱하다고 느껴지는 삶의 많은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인간성과 욕구에 대한 경계를 명확히 재정립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더해서,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도 자신의 삶 속에서 여러 상황들에 대한 자신의 위반 욕구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즉, 욕망과 두려움, 짙은 쾌락과 고뇌를 긴밀히 연결하는 그 무언가에 대해 오늘 하루 정도는 고민해 보면 어떨까 싶다 :)

작가의 이전글 트롤리 딜레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