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합 97세, 60대 아빠와 30대 딸의 걷고 또 걷기
“157Km를 걷었다고? 그런 걸 왜 해?”
“올해 또 87Km를 걷는다고? 도대체 왜?”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제가 이걸 왜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의문을 품은 채로 어쩌다 보니 3년째 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의적으로 157Km를 걸은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대회가 있고, 운동 프로그램이 있으며, 그것을 참가하는 사람들은 상상 이상으로 더 많다. 아빠와 내가 3년 동안 모 방송사에서 주최하는 이 ‘트레일 OO’ 대회를 참가하게 된 이유는 아빠가 정년퇴직을 하고 1년이 지난 후부터이다.
정년퇴직 후 아빠는 한동안 꽤 무기력해 보였다. 한 회사에서 30년 동안 매일 반복하던 일상이 멈췄을 때, 나는 아빠가 ‘자유!’를 외칠 거라 생각했다. 왜냐면 내가 그럴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아빠는 나와 달리 30년 만에 주어진 인생의 쉼표가 마냥 달갑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1년을 무료하게 보내는 아빠를 조용히 지켜봤다. 여행이라도 다니면 기분 전환이라도 됐을 텐데, 타이밍 좋게 코로나가 발목을 붙잡았다.
나는 그런 아빠를 바라보며, 어떤 기분일지 싶었다.
’ 자식 놈들 다 키워놓고, 열심히 다니던 회사도 이젠 사회적으로 졸업했고, 이제 좀 나만의 시간을 가지려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뭘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 것 같았다. 아빠는 특별한 취미 없이 가족에만 헌신한 근면성실맨이었으니까. 그리하여 취미를 가져보셔라하며 퇴직 선물로 끊어드린 골프회원권은 딱히 아빠의 흥미를 끌진 못했다.
그러던 아빠가 어느 날 나에게 핸드폰을 스윽 보여줬다.
‘트레일 OO, 버추얼 마라톤’
시작은 10Km였다. 10Km만 개인적으로 기록해서 주최 측에 제출하면 메달을 준단다. ‘10Km쯤이야.’ 하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이 방송국 놈들이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올해는 서울 올레길 트레킹을 기획했습니다’하며 문자를 뿌려댔다. 아빠의 핸드폰을 받아 문자를 봤다.
‘트레일 OO, 157K’
157Km? 어느 정도인지 감도 안 왔다. 그때 찾아봤어야 했는데, 지나고 보니 대충 서울에서 강릉까지의 거리더라. 한 번에 걷는 것도 아니고 2개월에 걸쳐 8개 코스를 완주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나 자신을 과대평가한 그때를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아빠와 나는 뙤약볕 아래서 걷고 또 걸었다. 한 코스당 평균 15Km 정도, 시간은 6시간 정도 되는 코스를 걸으며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우선 나는 종이인형 재질이었고, 장시간 걷는 것이 힘들었다.. 무더위 속에 생긴 변수는 신경을 날카롭게 했고, 즐겁자고 한 일이 즐겁지 않은 순간의 연속이었지만, 그럼에도 아빠는 매번 그 힘들고 어려운 여정을 계속했다. 앞서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뒤를 관성처럼 따라가며 나는 생각했다.
‘아빠는 이 힘든 일을 힘들어하면서도 왜 계속할까?’
아빠는 비가 와도 걸었고,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에도 걸었다.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걸어야 할까 싶은 순간에도 아빠는 묵묵히 걸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아마도 ‘할 수 있어.’를 증명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빠에게는 이 프로그램이 이뤄야 할 목표이자, 자신이 아직 도전할 수 있음을 증명해낼 수단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아빠가 같이 하자고 제안할 때마다 쉽게 거절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같이 걷는다고 살갑지 못한 딸이 살가워질 수 없고, 무뚝뚝한 아빠가 다감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들은 지나고 보면 분명히 좋았다. 초등학교 이후 아빠 손을 잡아 본 기억이 없는 내가 산을 오르며 아빠 손을 잡을 수 있었고, 아빠와 도시락을 먹어본 적 없던 내가 그늘 아래 자리를 펴고 앉아 과일 도시락을 먹으며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서울 일대를 걸어 다니며 아빠의 젊은 날의 추억을 들을 수 있었고, 긴 시간 걷고 난 후 더위를 식히기 위해 먹었던 냉면은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맛있게 먹은 음식이었다.
매번 내년에는 안 한다 하며 벌써 3년째이듯, 아마도 내년에 다시 참가 모집이 열리면 아빠와 나는 대한민국 어느 일대를 걷고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올해도 왜 하고 있지?’라는 의문을 가진 채 걷고 또 걷겠지만, 10Km가 87Km가 되고 157Km로 늘어나듯 아빠가 목표하는 바가 더 커질 때마다 내 힘이 닿는 데까지는 그 길을 같이 동행하는 가족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