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서 부쳐 봤어

휴식의 음식, 부침개 1

by 윤십이월


심심해서 부쳐 봤어

휴식의 음식, 부침개 1




네가 어렸을 때 엄마가 회사에 나와 있으면 늘 걱정이 몇 가지 있었어. 혹시 우리 아들이 배 고픈데 밥 달라는 소리 못 해서 못 먹고 있는 건 아닌가, 혹시 너무 많이 먹어서 탈 나는 건 아닐까, 심심해하지는 않을까 등등.

네가 어려서 식탐이 많았는데, 식탐이 소심을 이기지 못해 도우미 아주머니께 밥 달라는 소리도 못 했잖아. 그리고 온종일 심심해, 심심해를 입에 달고 살았고. 기억나니? 초등학교 1학년 때쯤 네가 하도 심심해해서 엄마가 종이에 놀이 이름을 하나씩 써서 보이지 않게 접은 다음 상자에 가득 담아줬잖아.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보고 거기 쓰여있는 놀이를 해보라고. 돌이켜 보면 그때 네가 심심하다고 한 건 사실은 엄마가 보고 싶다는 뜻이었던 것 같아. 엄마가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고, 같이 놀아줬으면 좋겠다는 뜻. 쪽지만으로도 엄마랑 같이 노는 느낌이 들어서였는지 그 뒤로는 심심하다는 말을 덜 했었어.


그런데 우리 아들 요즘은 안 심심한 것 같더라. 할 일도 많고 게임할 것도 많아서 심심할 새가 없나? 엄마는 우리 아들이 자주 심심했으면 좋겠어. 심심한 것만큼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조건은 없는 것 같아. 심심해야 생각, 오롯이 나만의 진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거든. 읽고 듣고 보고 만지는 외부의 자극이 너무 많아도 안 되고, 현실의 고민거리가 너무 꽉 차 있어도 안 되고,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노동이 과해도 안 되고. 그저 아무 일 없이 뒹굴뒹굴. 아! 심심해! 소리가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오는 시간 말이야. 이럴 때 생각의 고삐를 풀어 너의 사유가 한없이 내달릴 수 있도록 해봐. 고삐 풀린 말처럼 지칠 때까지 자유롭게 생각이 달려가 사고의 영역을 넓혀 놓을 때, 그쯤 되면 게으른 너의 두뇌와 팔다리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고 만들어내려고 노력할 거야. 너의 무한 창의력이 반짝 깨어나는 순간이지.

그냥 가만히 앉아 이 생각 저 생각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무언가 읽고 보고 듣고 경험해 자극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겠지. 하지만 외부의 자극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도 나만의 시간이 필요한 거야. 생각이 숙성될 시간, 바로 심심한 시간!

엄마는 창의성을 위해서는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 이외에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 두둑한 배짱! 창의적인 결과물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야.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그 기준에 맞추려다 보면 제아무리 출중한 창의성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지.

나이 잔뜩 먹은 아들 붙잡고 뜬금없는 창의성 얘기냐고? 어렸을 때나 창의성을 얘기하는 거고, 특별한 직업군에서나 창의성이 중요하지 나이 먹어 밥벌이하는 사람들한테는 다 물 건너 간 이야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창의성은 충분한 지식과 경험으로 다져진 땅을 든든하게 딛고 있을 때 비로소 만개할 수 있는 거야. 나이 먹으면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창의성을 기발한 공상 정도로 간주하는 데서 오는 오류일 뿐이야.

아들, 어렸을 때 너는 재능을 파악하기 좀 어려운 아이였어. 네 동생처럼 잘하는 것, 못 하는 것이 확연히 구분되고, 본인의 지향이 분명한 아이가 아니었거든. 어찌 보면 특별한 것 없이 무난하다고 볼 수도 있었는데, 엄마는 어린 너에게서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를 보았어.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주 따뜻하고도 독특한 너만의 사유라고 하면 비슷하려나? 엄마는 어린 너에게서 그것을 보았고, 그것이 지금 보이지 않더라도 네 안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고 생각해. 그건 쉽게 사라지거나 시들어 버리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엄마는 네가 자주 심심하고 너 자신의 생각에 대해 두둑한 배짱을 가졌으면 좋겠어.


자주 심심한 시간을 갖다 보면 입도 심심할 수 있으니까 오늘은 심심할 때 해 먹는 음식, 부침개를 가르쳐 줄게. 부침개의 종류도 참 무궁무진해. 반죽으로 무엇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밀가루, 녹두, 메밀, 감자 등이 있고 무엇을 넣고 부치느냐에 따라 김치, 부추, 애호박, 미나리, 파, 해물 등 한도 없이 많지. 우리나라 음식에는 전이 발달했는데, 전 중에서도 부침개는 큼직하게 부쳐서 나눠 먹는 것으로 아주 서민적인 음식이야. 그렇다고 옛날 사람들이 심심하면 부침개를 부쳐 먹었던 건 아닐 거야. 대두유나 옥수수유 등 발열점이 높은 식용유와 밀가루는 6.25 전쟁 이후에나 흔해졌고 그전까지는 귀한 식재료였거든.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전을 부칠 때는 들기름이나 돼지비계를 이용했어. 계란이 귀하다 보니 생선 등의 재료에 밀가루를 묻히고 계란물을 입혀 부치는 전유어는 부잣집에서나 만들어 먹는 음식이었고, 녹두나 메밀을 이용한 부침개 조차도 잔치 때나 구경해 볼 수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심심할 때 부침개나 부쳐 먹는다는 것은 근래에 가능해진 일이고, 밀가루가 흔해진 만큼 밀가루 부침개가 많아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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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중에서도 가장 만만한 김치 부침개부터 시작해 볼까? 김치 부침개는 집집마다 자주 해 먹는 만만한 음식인 만큼 레시피나 특급 팁들이 참 많고도 많아. 엄마도 뭔가 대단한 비법을 전수해줬으면 좋겠는데 미안하지만 김치부침개는 김치만 맛있으면 다 맛있고, 김치가 맛없으면 세상없는 비법을 써도 절대 맛이 좋아지지 않아.

그래도 한 가지 알려줄 만한 게 있다면 김치가 맛있고 없고 보다 더 중요한 게 잘 익었느냐에 달려 있다는 거야. 김치가 설익었으면 절대 김치부침개나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등 김치로 하는 음식을 만들지 마. 김치 뚜껑을 열었을 때 시큼한 냄새가 확 끼쳐올 정도가 돼야 요리에 투입될 준비가 된 거야.

맛있는 김치는 쫑쫑 썰기만 해도 되지만 김치 맛이 덜하거나 그래도 좀 섭섭하면, 썰어놓은 김치에 양념을 해. 설탕, 참기름을 기본으로 하고 국간장을 약간 넣을 수도 있어. 김치 속을 털어내고 배추만 쓸 경우에는 국간장으로 간을 더 해 주고 고춧가루도 좀 넣는 게 맞겠지? 하지만 김치를 속 채로 넉넉히 넣고 국물까지 조금 붓는다면 간은 이걸로도 충분할 거야. 간에 자신이 없으면 반죽이 완성된 다음에 팬에 작게 하나 부쳐서 먹어보는 게 제일 정확해. 간장까지 넣어도 간이 부족하다면 소금으로 보충하면 돼. 김치전은 별도로 양념간장을 찍어 먹는 것이 어울리지 않고 그냥 이것만 먹는 게 더 나으니까 간은 딱 맞추는 게 좋아.

김치 이외에 다른 재료를 넣는다면 대파(또는 쪽파)나 풋고추(매운 걸 좋아하면 청양고추) 정도를 다져 넣는 게 좋고 다른 재료는 안 넣는 게 더 좋더라고. 특히 양파나 계란 넣는 레시피가 많은데 우리 집에서는 넣지 않았어.


김치전의 취향도 가지가지야. 어떤 사람은 낭창낭창 쫄깃하니 담백한 전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기름 넉넉히 두르고 겉바속촉으로 부쳐낸 전을 좋아하지. 딱 너와 네 동생 취향이야. 그래서 엄마는 부침개 부칠 때 먼저 네 동생 용 반죽을 만들어 부치고, 반쯤 남았을 때 물 더 붓고 다시 반죽해서 네 것을 부쳤어. 불공평하다고? 김치는 네가 선 김치를 좋아하고 동생은 신 김치를 좋아하니까 네가 먼저 먹고 남은 걸 동생이 먹잖아. 이번엔 거꾸로 된 거니까 불평할 것 없어.

낭창낭창 전에는 김치를 아주 잘게 썰어 쓰는 게 좋고, 겉바속촉 전에는 조금 커도 상관없어. 좀 전에 김치전에 다른 재료를 넣는 건 엄마 취향이 아니라고 했는데 낭창낭창 전은 확실히 깔끔하게 김치 한 가지로 부치는 게 좋고, 겉바속촉 전에는 잘게 다진 오징어처럼 잘 어울리는 동물성 재료를 같이 넣어도 괜찮은 것 같아.

낭창낭창 전에는 글루텐이 풍부한 강력분을 써야 하고, 김치는 국물을 쪽 짜내고 쓰는 게 좋아. 겉바속촉 전에는 박력분이 어울리고 김치 국물도 조금 따라 넣어 얼큰하게 만들어도 좋지. 낭창낭창 전에는 부침가루는 섞지 않아도 괜찮고, 겉바속촉 전에는 반쯤 섞어주는 게 좋아. 특히 밀가루를 여러 가지 갖춰 놓고 쓰기 어려워 다용도 밀가루 한 가지뿐이라면 부침가루가 꼭 필요해. 혹시 튀김가루가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데 부침가루보다는 조금 덜 넣는 게 좋아. 부침가루 보다 바삭하기는 한데 베이킹파우더가 들어가서 조금 부풀어 모르거든. 가끔 부침가루나 튀김가루만 갖고 김치전을 만드는 레시피도 있던데 아무래도 조미료 맛이 나는 것 같아서 엄마 입맛에는 안 맞더라.

낭창낭창 전은 기름을 너무 많이 두르지 말고 팬에 반죽을 가능한 얇게 펼쳐 놔야 해. 그러려면 반죽의 농도가 묽어야겠지? 주르륵 흐를 정도로 묽은 반죽을 만들어야 해. 겉바속촉 전은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팬에 반죽을 살짝 도톰하게 올려야 해. 그러려면 반죽의 농도는 느리게 뚝뚝 떨어질 정도로 맞춰야 해. 불 조절도 달라. 낭창낭창 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약불로 조리하는 게 좋고, 겉이 누릇누릇해지기 전에 밀가루와 김치가 투명해지면 들어내야 해. 겉바속촉 전은 약불에서 반죽을 얹고 중강 불 정도로 올려서 양쪽 겉면을 바삭하게 한 다음 다시 약불로 줄여서 속까지 익혀 주는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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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적어도 서울 지역에서 김치전이나 애호박전, 부추전 등의 밀전병은 모두 낭창낭창 전이었지 겉바속촉 전은 아니었어. 시집온 며느리가 부침개 부쳐 오라고 했는데 겉바속촉으로 부쳤다면 엄청 구박받았을 거야. 밀가루 부침개는 비칠 정도로 얇게 부치면서도 찢어지지 않고 모양을 동그랗게 잘 유지하고 그러면서도 태운 데 하나 없이 부쳐내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거든.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 [그 남자네 집](현대문학 /2004년 / p.133~134))에 밀전병과 참외로 칠석 고사를 지내는 대목이 나와. 6.25 전쟁 직후 서울의 중인 집안으로 갓 시집온 새댁의 이야기이니 아마 오래전부터 서울 지역에 내려오던 풍습이었을 거야. 밀전병의 반은 그냥 밀가루 반죽만 부치고 나머지 반에는 가늘게 채 썬 애호박을 넣었고 새로 짜 온 들기름에 부쳤대. 그리고 압권은 밀가루 반죽에 있지. 밀가루에 물을 타서 바로 물 반죽을 만드는 게 아니라 밀가루를 치대서 칼국수 반죽처럼 말랑말랑 반죽하고 그걸 다시 물에 풀어서 부침개를 부치더라는 거야. 당시 밀가루에는 강력분 같은 것이 없었을 테니 치대서 글루텐을 형성시킨 다음에 다시 물에 풀어쓴 거겠지.

이것만 봐도 당시 밀가루 부침개가 겉바속촉을 지향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 요즘은 무슨 전이든 무조건 '바삭바삭'이라는 의성어가 따라붙던데 그만큼 사람들이 튀긴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일 거야. 인간이 튀긴 음식의 바사삭 부서지는 소리를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선조가 곤충을 먹던 기억이 유전자에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대. 하지만 인간이 아무리 곤충처럼 입안에서 바사삭 부서지는 튀김의 소리를 좋아한다 해도 지금처럼 식물성 정제유가 흔해지기 전까지 튀김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 아주 사치스러운 음식이었을 거야. 과잉 생산된 대두유 등 각종 식물성 정제유들은 글로벌한 공급망을 통해 짧은 기간에 전 세계인의 식단을 바꿔놨고 전통 식품의 조리법에까지 교묘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거지.


무엇이든 깊이 들여다보면 그 속에 세월의 켜가 보이고 시대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 같아. 밀가루 부침개 하나에도 역사가 스며 있어서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지층이 보이고, 세계 경제와 정치가 얽혀 있어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분분한 변화의 조짐들이 드러나거든.


아들, 이번 주말 오후에는 여유로워 딴짓을 하는 것보다 그냥 심심한 채로 뒹굴거리는 시간 갖기 바래. 낭창낭창하게 부친 김치 부침개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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