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계절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겨울,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얼마나 멋진 이름이며 딱 맞는 느낌인지.......’
제메이카 킨케이드라는 미국 작가가 쓴 소설 [루시]에 나오는 대목이야. 주인공 루시는 서인도제도의 영국 연방 내 독립국인 앤티가 섬에서 보모로 일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소녀였지. 그가 떠나온 곳은 ‘지구의 기울어진 자전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채 해가 쨍쨍하고 가뭄에 시달리는 단 하나의 계절만 있는’ 곳이었고, 그가 그곳에서 탈출해 도착한 곳은 ‘지구 상의 잘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살고 있는 1년 365일이 뚜렷한 네 계절로 나뉘는 지역’이었어.
만약 한 가지 계절만 계속되는 어딘가에서 태어났다면 나도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었을 것 같아. 아들, 엄마가 오십 년 넘게 살아 보니까 사람의 삶에 계절만 한 위로가 없더라. 지루할 새 없이 교대로 드나들면서 올 때마다 풍성한 선물 보따리를 들고 오잖아. 네 계절이 풀어놓는 각각의 공기와 풍경과 감촉과 냄새와 그리고 먹을거리들! 엄마는 네가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어.
살다 보면 삶이 신산하고 너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위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가 있을 수 있어. 가까운 사람이 마음속 고통의 근원이 되는 날도 있을 거고. 그런 날을 위해 너에게 위로가 될 무언가를 미리 마련해 두었으면 해. 대단한 취미 같은 걸 얘기하는 게 아니야. 계절의 변화를 눈여겨보고 느끼며 즐길 줄 아는 것 같이 생활 속에서 그저 소소하게 얻는 기쁨이나 위로를 말하는 거야.
엄마는 발병하고부터 계절 하나하나가 그렇게 사무치더라.
봄은 봄대로 내가 걷는 천변의 개나리 길, 어쩐지 그냥 걸으면 안 되고 애들처럼 겅중거리고 깔깔거리며 걸어야 할 것 같은 그 길이 얼마나 간지럽도록 어여쁜 노란색인지,
여름은 여름대로 내가 맡은 비 냄새, 열에 들뜬 대지를 식혀주고 갈급한 매미 울음소리조차 잠시 씻어주는 여름 낮의 소나기가 얼마나 다채로운 생명의 냄새를 품고 있는지,
가을은 가을대로 저기 저 낙엽, 햇볕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며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저 낙엽이 얼마나 바스라지도록 사무치는 그리움인지,
겨울은 겨울대로, 차마 쌓이지도 못하고 지상에 도달하자마자 녹아 없어지는 싸라기 눈, 가로등 불빛 아래서만 황홀하게 펼쳐지는 은색의 군무는 얼마나 가슴 시린 황홀인지,
내 생에 이 계절을 다시 맞을 수 있을지......
지난 글에서 김치 부침개 만드는 방법을 대략 알려줬으니 오늘은 그 밖의 밀가루 부침개들을 계절별로 살펴보자. 부치는 방법은 다 거기서 거기니까 겁먹을 것 없고.
우선 봄에는 미나리 전을 부쳐봤으면 좋겠어. 원거리 배송도, 하우스 재배도 안 되던 옛날에는 식재료가 갖는 계절성이 선명했던 것 같아. 미나리는 겨울 추위를 뚫고 제일 먼저 돋아나는 푸른 잎이니 얼마나 반가웠겠니. 그래서 ‘봄 미나리 살진 맛을 님에게 드리고저’라는 옛 시의 한 대목도 탄생한 거야. 향긋한 미나리는 밀가루 전으로 부쳤을 때 더욱 도드라져. 쌀이나 밀처럼 긴 세월 주식으로 자리 잡은 식품들은 향이나 맛이 있는 듯 없는 듯 아주 중립적이야. 그래야 물리지 않고 평생 먹고살 수 있고, 다양한 부식들과 함께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밀가루는 녹두나 메밀, 감자 등 전을 부쳐 먹는 다른 곡물들에 비해 재료 본연의 맛과 향을 잘 받쳐주는 것 같아. 미나리뿐 아니라 쑥, 달래 등 향기로운 봄나물은 뭐든 전을 부쳐 놓으면 맛있어.
벌써 육식성 우리 아들이 사계절 내내 풀만 부쳐 먹을 거냐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네. 김치 부침개에 다진 오징어나 돼지고기 등을 같이 넣을 수 있는 것처럼 미나리에도 어울리는 식재료를 찾아봐야지. 새우나 오징어 같은 해물은 무난하게 어울릴 테지만, 봄이니까 제철 맞은 바지락살을 넣고 부치면 좋을 것 같아.
여름에는 대표적인 부침개가 애호박전과 부추전이야. 애호박을 썰어 넣고 부친 밀전병은 박완서 소설에서처럼 칠석에 먹었지만 유두절, 복날 등의 절식으로도 만들어 먹었다고 하니 거의 여름 내내 즐겨 먹었다고 볼 수 있지. 이에 비해 부추전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네. 아마 부추전을 먹기 시작한 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지금 우리가 보통 부추라고 부르는 품종이 많이 재배되고부터일 거야. 그전부터 길러 먹던 재래종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가늘고 매운맛이 강했대. 그렇다고 애호박전은 무척 오래된 음식이고 부추전은 근래에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건 아니야. 호박도 ‘호’ 자 돌림의 다른 식재료들과 마찬가지로 조선 중기 이후에야 들어온 식재료니까 조금 이른 것뿐이지.
가을에는 달큼하고 고소한 김장 배추로 배추전을 부쳐 먹어봐. 배추도 데면데면 밀가루도 밍숭맹숭 아무 맛없는 듯하면서도 자꾸만 젓가락이 가는 게 배추전이지. 우리 집에서는 잘 안 해 먹었지만 가을 무를 살짝 쪄서 전을 부치기도 하고, 쪽파가 부드럽고 맛있을 때니 파전을 부쳐 놔도 맛있어.
겨울에는 김장 김치 썰어 넣고 부치는 김치 부침개를 제일 자주 해 먹고, 파전도 많이 해 먹는데 파는 해산물과 잘 어울리지. 특히 제철 맞은 굴은 밀가루, 계란 묻혀서 전유어로 부쳐 먹을 수도 있지만 부침개에 얹어도 잘 어울려.
하지만 겨울 전의 대표는 역시 녹두전이야. 엄마는 네가 손쉽게 부쳐 먹을 수 있는 밀전병을 중심으로 얘기하고 있으니까 그 밖의 곡물가루로 부치는 전은 아예 말하지 않았는데 겨울의 녹두전은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네. 요즘 유행하는 겉바속촉 부침개들은 사실 모두 녹두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해. 밀가루로 부치는 밀전병은 낭창낭창하게 부치는 데 비해 녹두전은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예전에는 돼지기름을 썼어) 두툼하게 부쳐 겉은 튀김처럼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거든.
마음 같아서는 녹두전을 가르쳐 주고 싶지만 이건 아무래도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뛰자고 드는 격이니 오늘은 가장 족보 확실한 애호박 밀전병 부치는 방법을 알려 줄게.
먼저 호박은 채를 썰어서 소금에 살짝 절여 둬. 말은 쉽지만 호박 채를 어떻게 썰라는 건지 소금은 얼마나 넣고 얼마 동안 절이라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고? 동글동글 잘라서 다시 길쭉길쭉 자르면 그게 채를 썬 거야. 길게 채 썰려고 어슷어슷 쓸 필요도 없고, 채의 길이를 맞추겠다고 애쓸 필요도 없어. 그냥 두께만 0.5센티미터 정도로 일정하게 맞추면 돼. 소금은 어떤 소금이냐에 따라 다르니까 정해주기 어려운데 절인다고 굵은소금 쓰지 말고 맛소금도 쓰지 말고 계란 프라이할 때 쓰는 고운 소금으로, 호박 한 개에 5꼬집 정도 넣으면 될 거야. 다른 재료 준비할 동안만 절여 두는데 30분 이상은 두지 않는 게 좋아.
호박과 같이 넣어 부칠 만 한 재료로 엄마는 대파와 풋고추 정도가 좋은 것 같아. 호박이 아주 순한 채소기 때문에 대파는 호박 한 개에 한 조각 정도만 길게 채 썰어 넣고, 고추는 반 개 정도만 다져 넣으면 될 것 같아. 호박이 충분히 달기 때문에 양파 넣을 필요는 없고, 마늘처럼 향이 강한 채소는 어울리지 않아.
김치부침개 부칠 때처럼 반죽에는 밀가루만 사용하거나 밀가루와 부침가루를 반반 섞어서 사용해. 밀가루만 사용하면 담백하긴 한데 아무래도 감칠맛이 부족할 수 있으니까. 건새우가루나 해물 가루 등을 사용하라는 레시피가 많이 있던데 글쎄 …… 애호박 부침개는 애호박 맛으로 먹어야지. 가루와 물은 1:1 정도인데 농도는 반죽을 저어가면서 맞춰야 하니까 처음부터 물 많이 넣지 말 것.
절여 놓은 애호박은 짜지 말고 그냥 반죽에 넣으면 돼. 김치부침개와 다른 점은 밀가루 반죽에 소금 간을 해야 한다는 건데, 이게 참 쉽지 않아. 짜면 절대 안 되고 슴슴하면서도 간이 맞아야 하거든. 엄마의 비법은 작게 부쳐서 시식하기.
팬을 달구고 기름을 두른 다음 약불에서 반죽을 한 국자 올리고 숟가락으로 얇고 균일하게 펼쳐줘. 밑면이 조금 익은 뒤에는 팬을 흔들어서 기름이 골고루 스밀 수 있도록 해주고 밀가루와 호박이 투명해지면 뒤집어서 마저 익혀주면 돼. 약간 노릇노릇한 건 괜찮지만 절대 태우면 안 돼.
김치 부침개는 그냥 먹는 게 맛있다고 했지만 애호박이나 부추 같은 채소 부침개는 간장에 찍어 먹어야 해. 간단히 초간장에 찍어 먹어도 되고 입맛에 따라 양념간장이나 양파 간장 등을 만들어도 좋아. 초간장은 진간장에 식초 몇 방울 떨어뜨린 거야. 기호에 따라 설탕을 넣기도 하고, 진간장이 너무 짜니까 맛술을 섞기도 해. 초간장으로 충분하지만 양념간장에 찍어 먹고 싶다면 진간장에 갖은양념을 하면 돼. 갖은양념이란 파, 마늘, 고춧가루, 깨소금을 기본으로 하고 식초 또는 참기름을 섞는 거야. 전을 찍어 먹으려면 참기름보다는 식초를 넣어야겠지?
엄마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춘분 지나고 청명을 며칠 남겨 둔 날이야. 너희 세대에게는 좀 낯설 수도 있는데 24절기는 계절을 즐기는 데 참 요긴해. 음력을 사용하던 동양에서 농사에 필요한 양력을 파악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으로 24절기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절기에는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어. 그건 삶의 리듬을 자연에 맞추고, 사람의 정서조차 자연의 리듬에 맡겨온 오래된 계절 사용설명서 같거든.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은 흙을 일구어 농사를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꽃샘추위의 시기이기도 해. 정확히 반반은 공평한 듯 하지만 늘 시샘과 갈등을 잠복시키지. 청명은 말 그대로 맑고 밝은 봄날이야. 그다음 절기는 곡우. 봄비가 내려 작물의 싹이 트고 나무에 물이 오르는 시기야. 네 생일은 청명과 곡우 사이, 화창한 봄날이야. 봄꽃처럼 화사하고 신록처럼 청명하고 봄비처럼 생명력 넘치는 우리 아들이 네 계절을 두루 가슴에 품으며 성숙해 가기를 엄마가 기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