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수다
변죽이 마음을 울릴 때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는 꽤 두툼한 책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른바 '뒷담화 이론'이었다. 사피엔스는 7만 년 전에서 3만 년 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인지혁명을 일으켜 다른 영장류와 차별화되는데, 인지혁명은 실제 하지 않는 허구를 머릿속으로 만들어내고 이것을 다수가 공유하는 능력의 획득이라고 한다.
인지혁명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설명하는 이론 중 하나가 소문과 수다를 통한 언어능력의 발달, 소위 '뒷담화 이론'이다.
뒷담화는 명백히 부정적 의미를 갖는 비속어인데 왜 저자가 콕 집어 이 단어를 선택했는지는 잘 모르겠만, 내용으로 봐서는 꼭 뒤에서 흉을 봐서 그런 능력이 생겼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사냥감이나 포식자 보다도 무리의 다른 구성원을 향해 늘 안테나를 세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눈앞에 없는 대상을 잘 그려내며 소문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가 나타났고 우리는 이 돌연변이의 후손이라는 뜻인 것 같다.
소문과 수다. 이것은 맹수의 발톱이나 맹독을 물리치고 사피엔스를 지구 상의 가장 강력한 종으로 만들어줬으며, 다른 한편으로 사피엔스 개별 개체에게는 놓여 날 수 없는 불안과 욕망을 안겨줬다. 아무리 대범한 사람이라도 평판에 무심할 수 없고,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라도 남 얘기를 한 마디도 안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인간은 옹알이를 시작할 때부터 평생 동류가 엮어 놓은 언어의 감옥에서 살면서 동시에 언어의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감옥이 아닌 놀이터로서의 언어에 가까운 시를 골라봤다.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 하지만 수다의 유희, 공감과 연대의 언어를 지향했던 시들이다.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 김영사 (2015년)
웅녀에게
미련한 것!
어쩌자고 그 깜깜한 굴속에
삼칠일이나 들어앉아 있었어?
그 독한 쑥, 마늘만 먹고.
천생 곰이었구먼.
이런 미련퉁이!
하필 그것도 여자가 됐어?
거기다 애까지 낳았다고?
서방은 금세 달아났겠지?
여전히 곰이었구먼.
그래도 잘했어.
잘한 일이야.
천년을 두고 생각해 봐도
8조법에 걸려 노예 살던 고조선 여인이 생각해 봐도
그래 잘한 일이야.
다시 천 년을 두고 생각해 봐도
민며느리 들어가던 옥저 여인이 생각해 봐도
역시 잘한 일이야.
또다시 천 년을 두고 생각해 봐도
쌍화점에서 손목 잡힌 고려 여인이 생각해 봐도
물론 잘한 일이야.
지금 와서 곱씹어 생각해 봐도
결국 잘한 일이야.
낳았으니까 길렀으니까
독하게 미련하게
잘한 일이야.
국수
발뒤축 달걀 같은 년들 모두 모여
국수 말아먹자
엉킨 국수 한 타래씩
설설 끓는 국물에 말아
후루룩 뚝딱
흉 잘 보는 시어미도
흉 많은 며느리도
한 상에 머리 디밀고
국수 말아먹자
후루룩 뚝딱
헛배 부른 식곤증
눈꺼풀 내리누르면
내친김에 후루룩 뚝딱
살림도 말아먹고 집안도 말아먹고
나라도 말아먹고 세상도 말아먹고
깜박깜박 선잠 끝에
맘 내키면 후루룩 뚝딱
네 이름, 내 이름
착하고 맑고 꽃같이 별같이 이쁜
이름들도 말아먹고
다음엔 또 무얼 말아먹을까?
고사(告祀)
뒤주 바닥 닥닥 긁고
팥 자루 탈탈 털어
떡 해 먹자
층층이 조상신들
변덕 많은 조상신들
구석구석 집 귀신들
시샘 많은 집 귀신들
골목골목 잡귀 악귀
심술 많은 잡귀 악귀
시시콜콜 불러내고
두루두루 불러 모아
떡 해 먹자
떡 해먹을 세상
떡 해 먹자
엎어둔 빈 시루
숭숭 구멍 뚫린 시루 바닥
구멍구멍 찬바람 드나들어
뭇 귀신 해코지에 몸살 나는 초겨울
떡 해 먹어도 상관없을 세상
그래도 떡 해 먹자
무럭무럭 더운 김 올려
지성으로 치성으로
떡 한 시루 해먹이자
저녁밥
극성맞던 땡볕도 설핏해지는데
저녁을 해야지 저녁을 지어야지
몇 날 며칠 속 태운 단내가 진동을 해도
이남박에 박박 문질러 쌀을 일어야지
타지 않게 설지 않게 밥을 지어야지
천불 나는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순한 된장 풀어 찌개를 끓여야지
넘지 않게 졸지 않게 지키고 있어야지
원망과 후회가 종일토록 자반뒤집기를 해도
간간한 고등어 한 손 석쇠에 올려야지
앞으로 뒤로 뒤집어가며 노릇노릇 구워내야지
뒷불 같은 울화에 콩 튀듯 하다가도
실한 콩 불려서 콩자반을 해야지
무르고 간 배도록 뭉근하게 조려야지
가슴속에 묵직한 돌멩이 하나 들어앉았어도
골마지 낀 오이지 몇 개 꺼내와야지
오이지 독엔 돌멩이 다시 눌러놔야지
마음속이 미친년 치맛자락 같아도
소반에 행주질 쳐 상을 차려야지
숟가락 젓가락 짝 맞춰 저녁상을 봐야지
식지 않은 지열이 꾸역꾸역 치밀어 올라도
해 기울었으니 저녁을 먹여야지
그 속이 속이 아니어도 밥은 먹어야지
단풍놀이
여름 볕이 모질어 단풍은 고운데
단풍보다 고운 옷 해 입고
단풍놀이 간다.
근심의 끝처럼 타들어가는 가을 산
그 산 하나씩 가슴에 품은
가을 같은 사내들, 가을 같은 아낙들
덤덤히 손 붙잡고, 나란히 어깨 부비며
내장산 단풍놀이 간다.
아까운 가을볕 살뜰히 거둬
붉은 고추는 붉게 말려뒀는데
내장산 단풍은 그래도 궁금해
끝내 숨기지 못한 이파리의 속내
맞장구치며 들어주러 가야지.
저리도 붉은 피를 어디다 숨겨두고
그 긴 긴 여름날을 시퍼렇게 견뎌왔나
청명한 하늘에 서리 품은 바람이
가슴속 갈피갈피 훑고 가도,
첫서리 오기 전에 바스러진다 해도
단풍나무, 너처럼만 미쳐 봤으면
이렇게 허허롭진 않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