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계는 유독하다. 아무리 고매한 직업도, 가벼운 아르바이트도 그것이 생계가 되는 순간 독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생계가 자신에게 유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한다. 삶의 방편은 쉽게 바꿀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일상에는 그 독을 풀어줄 해독의 힘을 가진 존재들도 있고, 그 독을 약으로 사용할 지혜도 자라나고, 약간의 독을 취향으로 즐길 수 있는 내성이 생기기도 한다. 삶이 견딜만해지는 이유이고, 지나간 시절이 미화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병이 없어도 은퇴를 준비할 나이에 이르고 보니 모든 사람들에게 지나간 시절은 벨 에포크라는데 공감하게 됐다. 그렇다고 '아, 옛날이여!'를 외치며 시대의 발목을 잡는 추태를 보이고 싶지는 않다. 생계는 그 때나 지금이나 유독하겠지만 민주주의, 인권, 성평등, 다양성 등의 사회적 가치에서 나의 벨 에포크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야만적이었다.
그 시절이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았던 우리의 젊음이 아름다웠을 뿐이다. 유독한 생계를 견디고 버틸 수 있었던 힘도 절반은 젊음에 있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입원 중이다. 좀 전에 약을 가져온 간호사는 식사시간을 놓쳤다고 했다. 그에게도 유독한 생계인 모양이다. 언제쯤이면 더 이상 생계가 유독하지 않은 시절이 올까? 인간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이 거의 필요 없어질 때 우리는 유독한 생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쓰레기가 되어 폐기 처분될까?
유독한 생계에 바짝 기대 쓴 몇 편의 시를 찾아냈다. 이 매거진을 발행하면서 처음으로 잠깐 울었다. 이 시를 쓸 당시, 아마도 15년쯤 전 나의 생계가 꽤 유독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