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행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냥한 척 뾰족한 폭력의 시대에 누구나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알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러려니 하고 넘기게 된다. 늘 있어왔던 일인데 뭘, 새삼스럽게. 그런데 나의 불행을 바라는 그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족들은 내가 불행하길 바랬다. 오해라고? 착각이라고? 물론 사람이 살아가면서 오해나 착각을 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을 수십 년 동안 하기는 어렵다. 그 정도면 더 이상 착각이 아닌 거다.
가족들은 불행한 사람들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무슨 이유이건 간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늘 뾰족했다. 항상 불만 가득했고, 남 탓을 했고, 자기보다 만만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내가 그들과 다르게 평범하다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은 그들의 불편을 더더욱 자극했다. 내가 자기네들처럼 불행해야 위안을 삼을 수 있는데 난 불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트집을 잡고 말도 안 되는 것에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이래도 비난, 저래도 비난, 뭘 해도 비난, 숨만 쉬어도 비난이었다. 너는 틀렸다, 너는 못났다, 너는 안될 거다, 너는 한심하다, 를 기본으로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해댔다. 더욱 신기한 건, 내가 점점 잘 될 때마다 욕설의 정도가 점점 더 심해졌다. 단지, 그냥 기분 나쁠 때마다 마음껏 걷어찰 수 있는 길거리의 쓰레기통, 딱 그 정도가 나의 위치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해주는 (경제적)지원은 끊임없이 받길 원했고, 나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싫은 소리, 앓는 소리, 안 좋은 소리 들어가며 해준 지원들은 조금의 시간만 지나고 나면 의미가 없어졌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마저 잃은 뻔뻔하고 이기적인 요구사항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지금의 아내와 연애했을 때, 아내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계속 만나든 그렇지 않든, 설령 헤어지더라도, 내가 잘 되길 바란다고.
무수히 많은 우주 중에서, 나는 지금 우리가 결혼한 우주에 살고 있다. 내가 진심으로 잘 되길 바라는 가족이 아내가 처음이다.
계절이 바뀌고 바람소리가 날이 설 때면, 수십 년간 받은 패악질의 아픔, 날이 선 흔적들이 나를 시리게 한다. 도대체 나는 왜 당연히 상처받아야 했을까. 최악의 인간들 곁에 있으면서 받는 고통이 원죄의 속죄라면, 내가 행한 그 원죄란 대체 무엇일까. 성장해 가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이 내가 나에게 던진 질문이다. 폭력과 폭언의 학대를 입은 아이는 어느덧 마흔이 되었지만,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괴롭히는 재미를 즐겼고, 함부로 걷어찼고,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라는 세뇌를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아쉬울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나에게 손을 벌렸다. 거절하면 천륜이니 뭐니 하면서 다시 세뇌를 반복했다. 그들은 네가 그러면 안 되지, 하면서 끊임없이 나에게 죄책감을 심었다. 나는 죄 없이 죄인이 되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가족들은 나에게 당연한 듯 상처를 줬고, 내가 선택한 가족들은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 준다. 단지 수동형인지, 능동형인지 그것 때문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