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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만든 미래, 말하지 못한 이야기 2화

내가 가장이던 겨울, 산타는 오지 않았다

by 연하나

* 이 글은 2화예요. 혹시 처음 오셨다면, 아래 링크에서 1화부터 함께해 주세요!


수능이 끝나자, 나는 곧장 공장으로 향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산타 대신 기계 소음과 눈송이가 내 곁에 있었다.




그날 오후, 나는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고사장에서 일을 떠올리며 수능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나는 시험지를 받자 펜을 쥔 손이 떨렸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번에 망치면, 내 인생에 대학은 없어......'


국립대, 장학금 목표, 현실적인 압박이 내 숨통을 쥐고 있었다. 가빠진 호흡, 초침 소리, 시험관의 눈빛. 등줄기에서는 어느새 땀이 맺혔다.



집에 돌아와 방문을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누군가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처럼 울었다.


"학비는 어쩌려고 거기 지원했어?"


가세가 기운 집 아이는 일찍 늙는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울면서도, 수능 가채점 결과로 지원 가능한 대학을 따져보았다. 결국 내가 갈 수 있었던 대학은, 집 근처의 사립대였다. 사립대치곤 높지 않은 학비였다. 다른 선택지가 없던 나에게는, 그마저도 다행이었다.


겨울방학이 되자마자, 집 근처 핸드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다행히 깊었던 허리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뒤였다. 그땐 수능이 끝이 나서라고 여겼었다. 친구들은 여행을 떠나고, 성형외과 예약을 잡았지만 나에겐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제 나는 나의 가장이었다.


“남의 돈 버는 거 쉬운 거 아니다.”


TV 드라마 속, 캔디 같은 여자주인공이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에서 홀대를 받는 장면이 생생했다. 그녀가 가게 뒤편에서 눈물을 훔쳤던 것도 그려졌다.


나는 남색 교복을 벗고, 남색 작업복으로 무장했다. 나와 같은 처지의 친구와 작업대에 나란히 앉아 핸드폰 부품을 조립했다. 작업은 단순했다. 한번 보고 손에 익을 만큼. 어려울 것은 없었다. 심장이 없는 기계 속 부품이 된 것 같았다. 너무 단순해서 자칫하면 정신을 놓기 십상이었다. 그러다 불량이 나는 작업 물이 생기면 작업 반장 아저씨에게 혼이 났다.


“100개에 불량 3개, 그 이상이면 교체야.”


우리는 인문계 고등학교 아르바이트생이었고, 거기 일하는 다른 작업자들은 또래였지만 실업계를 졸업한 정식 직원이었다. 우리는 반장아저씨에게 요주의 인물이었다. 대충 일하다 그만둘 애들. 다른 작업자들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성과를 냈지만 시급은 더 낮게 주었다. 그는 자주 친구와 나의 뒤에 서 감시를 하곤 했다.


어느 날은 그가 오전 내내 우리 뒤에 서 있었다. 우리는 한숨도 쉬지 못하고 손을 움직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건 공정 기계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착각한 것이었다는 걸. 한눈을 팔 수 없었기에 뒤를 돌아보지도 못했다.


"감독 아저씨 아니야. 잘못 본 거. 저거 봐!"


친구가 내 어깨를 툭치며 말했는데, 나는 놀란 눈으로 입을 벌렸다. 곧장 웃음이 터졌다. 너무 웃어서 눈에 눈물이 글썽 맺혔다. 정말 몇 시간이고 쉬지도 못하고 일했잖아 하고 친구에게 말했는데, 그녀도 그랬다가 자포자기 심정이 되서 작업대에 손을 때고 고개를 돌렸단다. 그런데 그게 그림자였다나.


오후가 되면 창밖에 쏟아지는 햇살 때문이었을까, 작업자들의 피곤한 한숨 때문이었을까. 공장 안은 졸음으로 가득했다.


달콤한 최면이 살며시 노크했지만, 나는 허벅지를 꼬집고 뺨을 때려가며 그것을 쫓아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마스였다. 그날에도 친구와 나는 공장으로 출근했다. 며칠 째 야근을 할 정도로 공장일은 바빴다.


휴일에 근무를 하면, 특근이란 이름으로 시급을 1.5배 더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선택은 아니었다. 강제 근무 같은 것이었다.


고귀한 산타클로즈는 발그레한 볼도, 흐뭇한 미소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나의 작고 볼품없는 세계로 오지 않았다.


그때의 출근길은 쓸쓸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고 단잠에 빠져있을 사람들은 아침부터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테 였다. 나는 괜스레 입김을 불어보았다. 입안의 공기는 하얀 연기가 되어 풍선처럼 부풀다 금세 사라졌다. 꼭 담배연기 같다고 생각했던 가.


출퇴근길에 바쁘게 오고 가서였을까. 상점 앞에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붉고 푸른 장식품 조각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공장 안은 여느 날과 같았다. 용접 쇳물 냄새, 철판 벨트 돌아가는 소리, 무표정한 사람들. 시간은 어느덧 조용히 흘렀다. 7시가 안 된 저녁 시간이었는데도 공장 안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 겨울의 시간은 금세 밤에게 도둑맞았다.


내 귓가에선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나직이 흘러들었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새하얀 눈송이가 자유로이 날아다녔다.


"아, 진짜...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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