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인가 코로나19 백신 예약을 위해 인증 기능을 활성화하면서 그동안 쓰지 않던 핸드폰 잠금 기능을 사용하게 됐다. 그러자 잠금 화면으로 등록만 해놓고 보이지 않았던 비단이 사진이 등장했다. 사진 구도를 바꾸려고 앨범을 열었다가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몇 개 등록했다. 꺼진 화면을 켤 때마다 매번 비단이의 다른 사진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무의식 중에 생각지 못한 사진을 보게 되니까 신선하고 작은 행복감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화면을 자꾸 껐다 켰다 하기도 한다.
저번에 쫓기지 않는 느낌이었다는 걸 깨닫고 난 후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해 봤다. 나는 쫓겼던 거구나. 그런데 쫓긴다고 말하니까 부정적으로 들리는데 힘들긴 했지만 그것이 부정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쫓기다 해방되면 뭔가 대단한 자유로움이 느껴져야 할 것 같은데 딱히 그렇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감이 있었다. 뭔가 잘 모르겠는 괴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마 처음엔 얼마간의 책임감과 즐거움, 만족감 등으로 달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 달리는 게 익숙해져서 속도에 대한 감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마주치게 되고 속도를 조절하지 못한 채로 어려움들을 지나오게 된다. 그러다 보니 속도를 감당할 수가 없어졌다. 마치 내가 달리니까 세상도 달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 발은 멈추지 않고 나는 생각한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 발이 멈춰버렸다. 그동안 기계적으로 달리기만 했었기 때문에 내가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누구와 달리고 있는지 왜,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달리는 걸 멈추고 보니 세상은 달리고 있지 않았다. 그저 달리고 있던 건 나뿐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마치 워커홀릭 같은 느낌이 들지만 나는 사회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냥 일상을 사는 것만으로도 이런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거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까 아마도 삶에서 누구나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달리다가 갑자기 멈추면 오히려 세상보다 내 속도가 느려진 느낌이 든다. 비단이가 떠남으로써 나는 멈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느려진 상태를 낯설어하는 나를 바라보게 됐다. 실은 달리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가 편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제 주위가 너무 선명하게 느껴지고 그동안 밖으로만 표출하던 에너지가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되면서 나는 어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이 상태를 견디는 건 힘들었다. 내가 이상해진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나를 바라보는 것뿐이 없었다. 달리던 상태에서는 못 보던 것들이 보이니까 지금의 나를 파악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내가,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해서 내 일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대로고 매일 밥해 먹는 것도 여전히 지겹다. 그런데 묘하게 정말 묘하게 숨 쉴 틈이 있다는 게 느껴지고 달리지 않아도 괜찮고 달리게 되더라도 힘들 땐 멈춰도 된다는 것에 위안을 느낀다. 이런 게 꼭 비단이가 나에게 남겨준 유산처럼 느껴진다.
202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