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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에 대한 소고

신과 인간에 대한 소고


1.

신과 인간에 대한 사유와 그것을 글로 옮겨내는 행위는 알지 못하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그러나 알아야만 되고 알 것만 같은 것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경외를 현실의 정신 작용으로 끌어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만 하는, 사유하고 또 사유해야만 하는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태생적 속성이 그 정신 작용의 뿌리를 지탱하고 있는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이러한 정신계의 작용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인간은 어떻게 이런 정신계에서의 작용을 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안타깝지만 다행이기도 한 것은,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답일 수도 있는, 또는 답일 것도 같은 것이 답을 대신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세상에서는 답이란 걸 꼭 알아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알게 된 것이 아닐 수 있게 된다.


아무튼 이러한 정신계에서의 작용은 애초 신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에 인간의 형이상학적인 탐구 능력이 더해져서 신을 인지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 결과 우리 인간은, 물질계에서 허용되었던 애초의 능력보다 더 큰 무리를 이루어 번성과 번영을 거듭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물론 어떤 것을 인지한다는 것이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만은 없겠지만, 인지하기에 그것의 존재를 믿는 것이 정신계의 작용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2.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접근법으로 답을 향해갈 때에야 비로소 사색자의 질문이 되는 법이다. 그렇지 못한 질문에 대해선 혹시 그 안에서 어떤 논리적 체계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의 가설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지도 못하다면 쓸모없는 기우나 호기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신이 먼저인지 인간이 먼저인지에 대한 질문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현명한 질문이면서 또한 우둔한 질문이기도 하다. 비록 현명한 질문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대한 현명한 답을 찾아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법이다. 그러니 우둔한 질문에 대해서 현명한 답을 기대하는 것은 질문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 신을 믿는 이에게는 신이 먼저인 것이고, 신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인간이 먼저일 것이다. 또한 오락가락 믿는 이에게는 그 답 또한 오락가락하게 될 것이다. 원래 우둔한 질문에는 현명한 답을 가장한 우둔한 답만이 찾아질 뿐이다. 그것은 신과 인간에 대해서라면, 그것이 어떤 질문이건 간에, 각자의 주관과 믿음의 문제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신성을 찾고 그것을 따르려는 인간의 본능은 절대자를 향한 회귀 본능이거나 귀의 본능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고 그 신은 인간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 말을 '신성 모독'이라 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인간 모독'으로 볼 것이다.


모독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를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배제해 본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으니 ‘인간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확인’ 한 것이고, 그 신은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에 의해 신으로서 존재하게 되었으니 ‘신은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확인’ 한 것이 된다. 그러기에 인간은 신을 벗어날 수 없고, 신은 인간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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