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고갈은 곧 시적 지혜의 결핍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시적 지혜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영감의 옷을 입혀내는 형이상학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현실에서는 실존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주술사의 몽환 같은 주문이기도 하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몽환에 취한 감상만이 이성의 경화 작용으로 거칠어진 삶을, 숨 쉴만한 숲으로, 쉬어갈 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반작용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식이란 게 아무리 쌓아 올려본들 선술집 즐비한 유흥가 구석의 허름한 횟집 앞에 퍼런 페인트 칠을 입힌 어항 안을 유영하고 있는 물고기의 뻐끔한 눈빛 같을 뿐이지 않을까. 어항 밖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지지 못했으니 늘 궁금하지만 체념해야 하고, 어쩌면 무엇이 궁금한 것인지도 모른 채 훤한 불 빛에 찰랑이는 비릿한 물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위안할 뿐이다.
다행인 것은 그 앞에 서서 부신 눈에 눈물이 고일만큼 한참을 지켜보다가 보면, 그래도 눈 흘겨가며 기웃기웃 때란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지혜의 밝음은 언제나 눈을 멀게 하고 뿌연 안갯속에서 들려오는 전설의 노래 한 가락 같은 것일 수 있다.
너의 그 지혜가 부럽다. 순응을 배우지 못한 나의 어리석은 삶에서도, 비록 그렇다고 인정해야만 하지만, 배울 것은 있을 거라고 위안한다. 물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세상을 거스를 수 있는 본능을 타고났다는 착각이 미소 짓게 한다. 그래서 늘 거칠고 좁은 물길을 찾아 나서는 어리석음을 지혜라 여기고, 세상살이는 험한 물살 헤치기일 뿐이라고, 할만한 것이라고, 주문을 건다.
지느러미를 퍼덕인다. 물길이 저기에서 내려온다. 조금 더 가면, 저기 저곳에 분명 이 물길이 시작한 곳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