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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부여된 태초의 능력에 대해

인간에게 부여된 태초의 능력에 대해



1.

언제 적부터인가 신은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개체를 만들어 이 땅에 내려놓았다. 적당한 육체적 능력과 적당한 정신적 능력이 부여된 그 개체는 신의 손과 호흡으로 탄생했던 그 이전의 어떤 개체들보다 완전해 보였고 그 결과에 대해서 신 또한 아주 만족했던 것 같다.

하긴 그 일이 태초의 케이아스를 정리한 후에 있었던 것이었고, 그 일로 인해 신은 비로써 창조주가 되었으니, 신의 입장에서도 스스로를 정말 대견해한 것 같다.


그래서 훗날에 누군가의 손을 빌어 그때의 감흥을 짧게나마 기록에 남겨 두었다.

“보기에 좋았다.”


그 개체는 지금 이 지구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라는 인간의 직계 선조이다. 고고학과 인류학적에서는 현존하고 있는 우리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명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때 신이 만든 인간이라는 개체는 바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고귀하고 신성하기까지 한 능력’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였을 것이 분명하다.



2.

적당한 능력을 부여받았던 인간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신에게 허락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탐하게 되었다. 인간은 태초부터 욕심이 많은 존재였던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욕심'은 어느 순간 방아쇠를 당기듯 하나의 기원으로 몰아가기 어려운 현상이다.

어쨌든 육체의 욕심은 물질적으로 더 큰 풍요를 갈구하게 만들었고 정신의 욕심은 ‘의문’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게 만들었다. ‘의문’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숙명>이고 현실에서의 삶을 아슬아슬하지만 고귀하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태초에 인간에게 주어진 ‘적당한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단지 그럭저럭 먹고살면서 크게 불평 없이 살아가다가 이 지구별의 지상을 떠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 그 정도란 것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는 창조주인 신조차 미처 정해 놓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라는 인간은 태초부터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능력’을 부여받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그때를 우리는 사유를 통해 돌이켜 볼 수 있다. 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게 되면, 그때에 우리에게 부여되었던 적당한 능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신이 창조주로써 인간에게 부여했던 적당한 능력이란, 신을 창조주로써 인식할 수 있고, 창조주를 따르고 섬길 수 있을 정도의 제한적인,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능력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인간에게 태초에 주어진 육체적인 능력은 신의 의도대로 아주 적당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신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태초에 신이 의도했던 적당함을 넘어선 ‘초과된 적당함’이 인간에게 주입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도 신의 능력에 비한다면 비교라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적 능력은, 비록 초과된 능력을 부여받긴 하였지만 결국에는 한 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과된 정신의 작용은 그 사실조차 잊게 만들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며 욕심을 부리는 우를 끝없이 반복하며 저지르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된다. 만약 인간이 조금 더 완벽한 존재로 만들었어졌더라면, 인간의 능력을 좀 더 신의 능력에 가깝게 만들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신을 좀 더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되고, 그러기에 신을 신으로서 좀 더 제대로 섬기고, 따르고 있지 않을까.

태초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건, 우리가 태초의 의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건 또는 그 의도를 벗어난 삶을 살아가고 있건, 인간에게 있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란 태초부터 주어진 본능이고, 그것의 양이나 질의 정도를 제한할 수 없으며, 그래서 때때로 탐욕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인간을 진정 인간다울 수 있게 하는 가장 고귀한 도구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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