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세계에서 <절대적으로 선한 것>과 <절대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단정 지어 부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선한 것>, 또는 <절대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무엇을 기준으로 그것들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절대 선>과 <절대 악>이라는 것이 태초부터 결정된 것이라면 그것들 또한 신의 창조물이니, 혹시 나름대로의 어떤 역할이 주어져 있지는 않을까.
특정한 종교에 묶여 있는 눈을 조금 넓게 벌려 보자. 교회에 가면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하고 절에 가면 ‘부처님이 계신다’라고 말을 한다. 이 표현이 절대적인 존재의 실체에 관한 것이건 또 다른 무엇에 관한 것이건 간에, 인간의 믿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 또는 부처님이 계신다.
인간의 믿음이 헛되지 않으며 또한 세상에서 가장 지적인 존재인 인간이 결코 헛된 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물론 이것 또한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의 가정일 수 있지만, 그분들은 어디엔가 꼭 계셔야만 하는 것이다.
대체 그곳에는 누가 계시는 것일까. 그분은 물적인 상태로 실체 하시는 것일까 아니면 영적인 무엇으로 계시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믿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영역이나 관념의 영역에 계신 것일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이것을 바라보면, 믿음의 중심이 우리라는 인간 자체라고 볼 수도 있게 된다.
믿음의 존재는 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물리적인 실체나 현상으로 찾아지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먼저 믿음 자체를 통해 그 존재를 인지하려는 노력이 가장 종교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믿음 자체가 먼저인지 믿어야 하는 대상의 존재가 먼저인지, 그분이 계시기에 믿는 것인지 믿음이 있기에 그분이 계시는 것인지를 어떻게 규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어찌 되었건 간에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믿음의 중심에 두면 각도가 조금 달라진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나의 생각과 마음, 나아가 나의 믿음으로 실체 시킬 수 있다면, 이러한 놀라운 능력을 가진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지금의 이곳에 있게 된 것일까.
하나님도 부처님도 아니지만, 비록 그분들 같이 될 수는 없지만, 그분들을 인지할 수 있고 믿음의 한가운데에 모실 수 있을 만큼이나 대단한 능력을 가진 실체로서 이곳에 있는 나는,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나는 누구인가.”
돌아보면 구석구석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어찌 이토록 완벽하게 그분들을 인지하고 믿으며, 그분들에 대한 사색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가고 있단 말인가.
물론 때론 그분들의 존재를 부인하기도 하지만, 부인한다는 것은 시시콜콜 따져볼 만큼이나 그분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고, 부인한다는 것이 결코 그분들의 존재를 존재치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을 단지 자연적인 진화를 통해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만 보자니 인간의 삶이란 게 한낱 지나가는 바람 같이 느껴질 것 같다. 그렇다면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 동력이 겨우 인간의 염세적인 감상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을 텐데, 염세가 만들어내는 허무의 짙은 안개를 어떻게 걷어내어야 할 것인가.
선과 악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선은 당연한 것, 있어야 하는 것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악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선에 비해서 악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악의 역할은 무엇일까. 악은 왜 있어야 하는 것일까. 악은 그냥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이유가 있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악은 누가 만들었고 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일까.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악과 선은 동반자임이 분명하지만, 그 존재적 가치를 제대로 인지하기엔 인간이 가진 사고의 끈이 너무 짧은 것 같다. 하지만 악의 역할에 대한 고민에 선을 따라가다가 보면 한 가지 가설에 도달하게 된다.
“악은 선을 더욱 밝게 만든 존재이다.”
선의 양지는 악의 그늘이 있기에 더욱 밝게 빛나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누군가는 악한 역할을 담당해야만 선한 이의 역할이 돋보이게 된다. 그것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선한 이의 역할이 더 어려울까, 악한 이의 역할이 더 어려운 것일까.
그분의 뜻을 알 순 없지만 악이 선을 이끌어낸다면, 선의 역할을 밝혀 준다면 그 악을 ‘절대 악’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악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악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행위에는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악이라 여긴 그것이 결말에 가서는 결국 선으로 이어지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그런 역할을 어렵사리 수행하였다면, 그것은 <악하지만 꼭 악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악> 일 수 있을 것이다.
선해야 한다든지, 선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선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라는 식의 입에 발린 말은 누구나가 손쉽게 뱉어낼 수 있는, 자신을 선한 이로 보이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혹시 지금껏, 선의 이데올로기에만 매달려 살아온 것은 아닐까. 악이란 게 단지 고개를 돌려 외면할 것만이 아니라, 눈을 마주 봐야 할 삶의 동행은 아닐까. 선과 악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 인지능력조차 부족한 형국에 어찌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나는 선하다, 는 말이 결국에는 나는 악하다, 는 말과 닮아 보이는 것은 내가 선하기 때문인 것일까, 악하기 때문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