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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발리스를 찾아서, 초입에 들어서며

노발리스를 찾아서, 초입에 들어서며     


"문학이야말로 거짓이 없이 절대적으로 진정한 것이다. 이것이 나의 철학이다. 시적이 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욱 진실해지는 것이 문학이다."   


머리며 가슴에 물기 가득 차 있었던 그 시절의 나를 사로잡았던 이 멋진 표현은 문학에 대한 <노발리스>의 철학을 문장으로 옮긴 것이다. 노발리스가 문학가이자 철학자였으니, 그의 문장에 철학적이란 표현을 붙이는 것이 전혀 어색할 일은 아니다. 


아무튼 지금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노발리스>의 작품에 대한 문학적인 평가나 그가 남긴 족적에 대한 기술, 또는 분석 같은 것이 아니다. 왜 <노발리스>를 찾아가려 했었는지, 그때는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인지, 그 시절에 어떻게든 저질러야만 했던 일종의 ‘흉내 내기’를 돌아보며, 그것에 대한 어설픈 자기변명을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늘어놓으려고 한다. 

 

//노발리스(2 May 1772 - 25 March 1801): 초기 낭만주의(제나 낭만주의) 대표적 작가인 <노발리스>(독일어: Novalis)는 1772년 5월 2일에 태어나 1801년 3월 25일에 세상을 떠난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 소설가이다. 노발리스가 세상에 머문 것은 불과 스물여덟 해와 열 달 이십일 정도이지만(약 스물아홉 해) <낭만주의>에 남긴 그의 족적은 가히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노발리스라는 이름은 그의 필명이며 본명은 <게오르크 필립 프리드리히 프라이헤르 폰 하르덴베르크>(독일어: Georg Philipp Friedrich Freiherr von Hardenberg)이다. Freiherr(프라이헤르)는 독일어에서 남작(귀족 계급 중에 가장 낮은 단계)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노발리스는 독일 작센 지방의 몇 안 되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노발리스의 초상화(1799년, 26세 경)

 

//예나 낭만주의(Jena Romantic): 예나 로만틱 또는 초기 낭만주의는 약 1798년부터 1804년까지 예나를 중심으로 한 그룹의 작업으로 대표되는 독일 문학에서 낭만주의의 첫 번째 단계이다. 그 운동은 후기 현대 철학에서 독일 관념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야기란 게 원래 입 밖으로 튀어나오면 주절주절 길어지기 마련이고 그러다가 보면 종종 이성의 영역 또한 넘어 서기 일쑤이다. 그러니 적당한 지점에 멈추어서 대충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리는 것이 좋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언젠가’라는 단어를 불쏘시개 삼아 휙 휙 휘젓다가 보면 간혹은 제 혼자 다듬어지고 살이 붙어서, 모호하긴 하지만 적당히 보기 좋을 만큼의 형태를 갖추는, 설명을 해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신비로운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물론 늘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가 아주 간혹은 있기에 내심으로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게 된다.  

     

당시의 기울어진 글 읽기 습성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그 습성은 지금에 와서도 별반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문학과 철학과 예술을 대충대충 쌓아 놀린 울타리 안에 한꺼번에 밀어 넣고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뒤적거리며 들추어보려는, 그러면서 이리저리 아귀를 맞춰 보려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그 결과란 게 가끔은 이상하고 모호한 논리를 발현시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지극히 나쁜 것이라고만은 할 수도 없기에 나름대로는 아는 채하며, 사실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기에, 지금껏 잘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문학과 철학과 예술 사이에는 살갗을 비비며 살아가는 부부 사이에나 있을 법한 떼어낼 수 없는 애증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관계란 건 가장 가깝기는 하지만 너무 먼 것도 같고, 서로를 잘 아는 것 같은데도 뜯어보면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것 같은, 붙어 지내려 하지는 않으면서도 막상은 멀리 떨어지려고도 하지 않는, 말로는 표현해 내기 어려운 어떤 느낌과도 같은,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을 하곤 있지만 사실은 철학과 문학과 예술 중에 어느 것이 어느 것의 바탕인지, 누가 누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살아가다 보면 “명확하지 못하다.” 또는 “그럴 것 같다.”라고 말해버리는 것이 마음 편안해지는 경우가 생각하는 것보다 잦다. 분명 어떤 구분이 있을 것 같은데도, 그 사이에는 어떤 막이 아주 얇게나마 가려져 있을 것 같은데도, 막상은 그것의 경계가 너무 희미해서, 떼어낸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이 결국에는 무색해질 것 같은, 그래서 그냥 넌지시 바라보며 불만 없는 눈웃음으로 흘겨보아야 하는 모호한 생각이나 상황에 빠져드는 때를 종종 겪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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