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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사색, 돌길을 걸으면서

피렌체의 사색, 돌길을 걸으면서


어제 그리고 어제의 어제와, 이젠 가물거리기만 하는 또 다른 무수한 어제들, 바람처럼 왔다가 그냥 흘러가버린 무심한 시간과 시간들, 그리고 어딘가에 숨어 지내고 있는 그날의 그것들은, 기억 속에서 걸어 나오는 순간, 그것이 비록 잠시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추억의 호숫가를 가두는 자욱한 안개가 된다. 


또각또각, 걸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날카롭게 되뇌고 있는 이 돌바닥도 이윽고 지난 여행의 흔적으로 남겨질 것이다. 

물감 마르지 않은 그림을 마주하는 듯 아직은 선명하기만 한 지금의 추억들 또한 형체 잃어가는 가을날 낙엽의 울음소리처럼, 언젠가는 먹먹하게 멀어져 갈 것이다. 

시간은, 추억은, 그렇게 채색되어 갈 운명이었나 보다.

           

안갯속에서     


지난밤의 어둠 속에서 

깨어난 말간 햇살에 

물빛 비늘처럼 반짝거리다가

불쑥 스러지는 너는,

높이 오를수록

떨어질 때의 아픔이 더 커진다는,

그때의 나는 미처 몰랐던 것을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안갯속 어딘가에서 문득 나타나서, 발밑에 떨어져 밟힌 후에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 어디 한두 가지란 말인가. 

초록의 목소리로 환한 웃음 띠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날들이, 그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가장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왜 깨달음은 늘, 때가 늦은 후에야 찾아오는 것일까. 

지나간 날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멋쩍은 행동은 여행길에서도 멈춰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것이, 꼬깃꼬깃 접어둔 누런 종이 뭉치를 조심스럽게 꺼내 펴서, 검은 잉크 잔뜩 찍어 꾹꾹 눌러서 쓴, 진갈색 시간들의 퀴퀴한 족적인 것일까. 

탈피를 통한 완전한 변태만이 지금의 시간에 새로운 겹을 씌울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만 새로운 시간들에, 새로운 기억들을 새겨 넣을 수 있단 말인가.       


벗어버리고, 벗어나야만 온전한 탈피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다시 그때의 어딘가에 갇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아마도 스스로를 가둔 것이거나,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떠나지 못하고 벗어나지도 못하니, 겹겹의 종위 위에 켜켜이 쌓아 둔 그 시간들을 어찌 탈고할 수 있단 말인가. 


질문을 던지지만 답이란 걸 찾지는 못한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 

체념이란 건 노력일 뿐 결과는 아니다.      



곧게 난 피렌체의 돌길을 걷는다. 

울퉁불퉁 딱딱한 이 돌바닥의 느낌이 전혀 낯설지 않다. 

저 무수한 사람들의 발자국이 새겨진 이 길과, 까마득하지만 실상 그리 멀지는 않았던 살아온 길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렵사리 알아차리게 된다.       


조금 더 걸어야겠다. 

조금 더 돌바닥의 느낌을 온몸으로 읽어야겠다. 

그래 피렌체는 단테의 도시이지. 

거리며 건물 곳곳에서 피렌체의 이방인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빈 무덤만이 피렌체를 지키고 있는 그에게는, 단테 알리기에리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마지막 순간에는,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를 만나 황금으로 장식한 마차를 타고 천국으로 올랐다지. 

참 다행스럽고 부러운 일이다.     


어디론가 발걸음이 끌려간다. 

약속 잡지 못한 방문에 혹여 그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재촉하는 걸음 저 편에서 누군가 햇살을 헤집으며 걸어오고 있다. 

짙은 실루엣이 형체를 뭉개어버렸지만 눈 찡그려 헤아려본다. 

어쩌면 잠시, 길을 물을 수 있지 않을까.

이 길이 그 길이냐고.


#피렌체 #단테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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