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한 때, 음악이란 걸 한답시고 악기사며 음악실을 전전하며 살아간 날이, 제법 길게 있었다.
타고난 구강의 구조 덕에 두성과 탁성을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알았고, 거기에 화통을 집어삼킨 듯 성량까지 풍부했던, 그래서 나를 완전히 매료시킨 ㅇㅇ형과 여러 해를 뒹굴며 지냈었다.
작지만 늘 강해 보였고, 배변하듯 독설을 쏘아붙이곤 했던 ㅇㅇ형과 나는 온몸에 물기 가득했던 그 시절을 기타와 노래와 알코올의 취기로 보냈다.
ㅇㅇ형의 독설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처음 만난 날 ㅇㅇ형이 나에게 한 말은 "개 짖는 소리보다 못하다."였고 나는 "개 짖는 소리 더 들으면 되겠네."며 더욱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불렀었다.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우리는 음악과 알코올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비록 싸구려 알코올에 취하곤 했지만 우리의 음악만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우리의 노래 속에서는 시인 이상의 날개가 돋아나기도 했고, 플라톤의 이데아가 펼쳐지기도 했다.
어두운 어느 날의 밤, 그날도 초저녁부터 들이킨 소주의 취기에 비틀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세상의 귀로는 의미를 잃었지만, 생각하는 자의 귀에는 고귀하게 들리는 단어와 문장들이 검은 허공에 걸린 오선지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순 레코드 가게의 조명 앞에서 적막함에 휩싸였다.
조용필의 큐가 색 바랜 낡은 스피커의 우퍼에서 튕겨져 나와 우리의 영혼을 할퀴었다.
젠장, 노래란 게 이토록 날카로울 수 있다니, 우리는 울고 있었다.
그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우는 것뿐이었다.
스피커의 우퍼도 울고 있었고, 레코드 가게의 백열등도 파르르 울고 있었고, 어둠 내린 거리도 검게 울고 있었다.
젊음은 잠시 맡겨져 있었던 것이란 걸, 그리고 자연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푸르른 시간은,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그 일이 있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비록 안다고 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코 사실이 되지 않는다고, 애써 외면하며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의 무언은 강한 인정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각자의 길을 찾아야만 했다.
난 대학 캠퍼스로 돌아가서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 형은 그러지 못했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깊이 들어서 버린 것일 수 있었다.
그 형은 음악의 미련을 끊지 못한 채 음악의 언저리를 맴돌며 생활을 해결하고자 했다.
조용필의 큐Q를 들으면 아직도 눈가에 물기가 맺힌다.
살아가면서 익힌 것들 중에 하나는 속울음 짓는 방법이다.
그래서 지금은, 눈물 떨어뜨리며 우는 일 따위 없다.
추억은 아련해짐으로써 더욱 아름다워진다.
다중 우주론에 따르면 그 시간의 나와 그 형은 지금 어느 다른 우주에서, 레코드 가게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큐를 들으며 울고 있을 것이다.
밤안개가 더욱 짙어지는 것을 보니 가랑비라도 내리려나 보다.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시간을 회상하며 속울음 짓는다.
행여 눈물 흘린다고 흉보일 일 없게 차라리 비가 내리면 좋겠다.
그 공간, 그 레코드 가게, 그 낡은 우퍼, 그리고 그 백열등, 추억의 커튼은 영원히 닫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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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에서 조용필의 <큐>을 만난다.
https://youtu.be/fjODT21TRVs?si=jZRR-5Z0NYIkXC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