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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문학의 꽃발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문학의 꽃발에서


그는 사람을 괜히 수다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에 대한 얘길 늘어놓을 때면 오직 천재에게만 붙여지는 '창의적'이란 단어를 빼놓을 수 없게 된다. 

그의 유혹은 피해 갈 수 없을 만큼 진하다. 

그가 르네상스라는 아름다운 정원에 섬세하고도 우아한 그만의 꽃밭을 꾸며 넣은 것은 600년도 더 이전의 일이지만 그 꽃밭에서 피어난 꽃들은 지금도 매혹적인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의 꽃밭에서 노니는 일은 르네상스의 정원 피렌체를 돌아다니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일이다. 

피렌체의 또 다른 이름이 플로렌스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가 보다. 

    

화가이며 조각가이고, 건축가이며 토목 기술자이고, 기계 기술자이며 화학자이고, 발명가이며 해부학자이고, 식물학자이며 지리학자이고, 도시공학자이며 천문학자이고 또한 음악가인 그를 소개하다 보면 마땅히 끊어 읽을 곳을 찾기 힘들어서 숨이 가빠지기 일쑤이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자의 범주에서는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그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실체를 찾으려는 것은 새벽녘 안갯속에서 어른거리는 하얀 꽃송이의 실루엣을 더듬으려는 것과 같은 일일 수 있다. 


오늘은 하양을 말갛게 칠한 조각배를 안개의 호수에 띄워 그가 피워낸 꽃송이를 행여 시들지 않도록 살포시 채집해 와야겠다. 

이제 꽃송이를 다른 곳에 옮겨 담아야 할 시간이다. 

바로 저기에 꽃병이 보인다. 

눈을 비벼 가만히 살펴보니 ‘인문학’이라는 레이블이 붙어있는 투명한 유리꽃병이다. 


인문학이 인간의 본연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학문이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는 인문학자임이 틀림없다. 

그를 인문학자라 부르는 것에 대해 행여라도 의심의 눈초리를 뜨는 이가 있다면, 무지함이라든지 편협함이라는 이름의 안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린 것은 아닌지 스스로가 확인해 봐야 한다. 

만약 그를 인문학자라 부를 수 없다면 ‘자신의 아비를 아비라고 부르지 못하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게 된다.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

인문학은 인간의 실체에 대해 사상적 문화적 측면에서 탐구하는 학문이다. 

좀 더 자세하게는 인간의 근원문제를 탐구하는 것, 문화와 예술적 측면에서 인간을 탐구하는 것, 철학적 신학적 측면에서 인간을 탐구하는 것, 사상적 사회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탐구하는 것, 인간의 가치에 대해 탐구하는 것, 인간만이 지닌 자기표현 능력을 탐구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대한 연구방법을 탐구하는 것 등이 단일 학문으로서 또는 복합적인 학문으로서 행해지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로마시대에는 고등교육의 측면에서 ‘자유인문학’이란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로마시대의 자유인문학에는 4과 3학의 7가지 과목이 포함되어 있다. 

4과에는 음악, 기하, 산술, 천문이 속하며 3학에는 문법, 수사, 논리가 속한다. 

이들 7개의 과목들은 실용적인 측면에서의 기술들 또는 ‘행위의 방법들’로써 강조되었으며 중세 교육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등교육의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다. 

인문학은 르네상스시대에 이르러 커다란 전환을 이루었다. 

르네상스시대의 인문학은 4과 3학의 전통적인 분야로부터 문학 및 역사와 같은 학문적인 분야로의 확장 및 전이를 통해 실용적인 측면을 넘어 학문적인 주제로 성장하였다. 

현대에 와서 인문학은 고전학, 역사학, 언어학, 음악사학, 공연예술학, 미술사학, 철학, 종교학 등과 같은 다양한 연구분야를 망라하는 거대한 학문분야가 되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세밀한 호기심은 그를 마치 변덕스러운 사내아이처럼 보이게 했을 수도 있다. 

레오나르도는 이 호기심을 꼼꼼한 관찰과 섬세한 생각하기를 통해 글쓰기와 스케치라는 손의 긁적임으로 승화시켰다. 

무언가를 긁적인다는 것은 틀림없이 좋은 버릇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그의 긁적임을 기록하는 수단은 글과 그림이었다. 

이 긁적임의 우물에서 조각과 회화, 설계와 무대장치 등과 같은 수많은 작품들이 퍼올려졌기에 그의 긁적임이야말로 마지막 순간까지 마르지 않은 그의 영혼이었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우상이면서 질투와 경외의 대상이다. 

질투와 경외는 검의 양날과도 같은 것이다. 

한쪽 날은 동기를 부여하는 긍정적 도구로서 작용하지만 다른 한쪽 날은 좌절하여 주저앉게 만드는 부정적인 도구로 작용한다. 


그를 알아가면 갈수록 넘칠듯한 지식에 행복해지긴 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지를 알아차리고서는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깊은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어떤 노력을 하든지, 어떤 식으로든지 그저 먼발치에서나 바라볼 수 있을 뿐이고 그의 언저리에는 결코 다가설 수 없다고 한다면 지나친 자기 비하인 것일까. 


적당한 지식을 쌓으면서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는 한 사내가 혹시 흉내나마 내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형상화, 기록 남기기, 관찰과 생각을 검은 글자에 새겨 넣기와 같은 것들이라면 어쩌면 시도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헛된 용기나마 내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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