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카라바조 전기: 로마의 부활, 1590년대의 로마

카라바조 전기: 로마의 부활, 1590년대의 로마


1592년에 선출된 제231대 교황 클레멘스 8세(재위: 1592년 1월 30일 - 1605년 3월 3일)는 ‘가톨릭 신앙의 부활’을 상징하는 의미로 로마의 교회들을 부활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 일환으로 로마 전역에 새로운 교회들을 지었고 오래되어 낡은 기존의 교회들은 리모델링을 통해 부활시켰다.


이에 이들 교회의 내부와 제단을 장식할 그림과 조각 작품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의뢰되고 있었다.

1592년은 카라바조가 로마에 도착한 해이다.

카라바조가 카라바조라는 이름의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천재적인 실력으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여건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결코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서 몰려든 수많은 예술가들은 교황청(바티칸, Vatican city)에서 걸어서 약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티베레 강(River Tiber)의 동쪽 지역인 포폴로 광장(Piazza del Popolo)과 스파냐 광장(Piazza di Spagna, 스페인 광장) 사이의 넓지 않은 지역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출신지역에 따라 각기 별도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지내고 있었다.


서로 다른 공동체들과 그 구성원들이 하나의 구역에 함께 거주하게 되면서 공동체들 사이에서, 그리고 개별 예술가들 사이에서 분쟁과 경쟁, 불화와 복수 같은 분란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로마의 그 지역은, 비록 그들 사이에는 예술가라는 공통점이 있긴 했지만, 오직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그야말로 정글과도 같은 곳이 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 지도

지역에 따라 그들만의 왕국(Kingdom)들과 공국들을 이루고 있고,

그 중앙에는 교황령이 자리 잡고 있다.


16세기의 이탈리아 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의 이탈리아는 지금과 같이 중앙집권적인 하나의 국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지역마다에는 각각의 세력들이 그들만의 왕국이나 공국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들마다의 강한 지역색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각기 다른 지역색을 가진 이들이 좁은 하나의 구역에 집중해서 살게 되면서 공동체와 개개인 간의 분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들 간에 있었던 분란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비록 당시의 로마가 예술작품의 수요가 많은 도시이긴 했지만, 그 수요에 비해 예술가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당연히 경쟁이 치열했고, 경쟁이 치열한 만큼이나 반목과 다툼은 일상적인 행위가 될 수 밖에는 구조였다.

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포폴로 광장]과 [스파냐 광장]은 직선거리로 약 800미터, 걸어서는 약 11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두 개의 광장(Piazza)이다. 카라바조 당시 이 구역에 약 2천여 명의 예술가들이 몰려 살았다. 그들이 이 구역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성공’이라는 열쇠를 손에 쥐는 것뿐이었지만 그것은 오직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당시 로마는 원래부터 로마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들 이외에도 오직 권력의 쟁취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몰려든 권력형 성직자들과 귀족들과, 진정한 신성과 구원을 좇아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순수한 종교 사제들과 순례자들, 그리고 성공과 명예를 좇아 몰려든 예술가들과, 더 커다란 경제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부유한 상인들, 바티칸에서 고용한 용병들과 같은 다양한 이주민들이 ‘로마인’이란 이름으로 뒤엉켜 살아가는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이었다.


그런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로마인들의 사회적 신분은 봉건주의적 체제가 지배하고 있던 다른 지역에서의 그것보다는 훨씬 유동적이었다.

다른 왕국들이나 공국들에서라면 몰라도 적어도 로마에서는, 자신의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는다면, 그리고 기회를 잡게 된다면, 누구나가 현재의 신분을 뛰어넘어 커다란 명예와 성공을 쟁취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물론 비록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가 그 능력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로마에서라면 그 기회를 잡을 확률이 다른 지역에서보다는 훨씬 더 높았고 또한 그 기회는 당장의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로마를 살아가고 있던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당시의 로마는, 현재의 뉴욕이 그런 것처럼, 특히 예술가들에게는 ‘꿈을 꾸게 만드는 도시’이자 ‘잠들지 않는 도시’였고 그만큼 역동적인 사회였다.


당시 로마의 그런 환경은 로마에서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부정적인 것에 빠지게도 만들었다.

로마로 흘러든 사람들은 부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럴 각오가 있었기에 그들은 그 먼 길을 걸어서 로마라는 낯선 도시로 흘러든 것이다.

생계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비록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금지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못할 짓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이 살던 지역을 떠나 로마로 간다는 것은, 오늘날로 치자면,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 멀고 먼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만큼 힘들고 고된 일이었다.

오늘날의 이민자들이 그런 것처럼 당시 로마로 흘러든 이주민들의 가슴에는 ‘로마 드림(Rome Dream)’이 차올라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았던 곳을 완전하게 떠나온 이상, 어차피 어느 누구도 원래 살았던 곳에서의 자신에 대해서는 알 길 없을 테니, 지나간 일들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주관과 형편에 따라, 지울 것은 지워버리고 부풀릴 것은 부풀리면서 적당하게 채색하면 될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들 모두는 가면을 쓴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양손에는,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자신의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사회적 가면들이 필요한 만큼 들려 있었을 것이다.


부활하는 로마는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고 있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먹고살아야 하고, 조각가는 돌을 다듬으면서 먹고살아야 한다.

로마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도시였다.


로마로 몰려든 예술가들 대부분은 그들이 이미 성취한 것보다 더 크고 많은 것들을 이루어내기 위해 서로 반목하고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자신의 신분을 가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예술가들을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자신의 실력을 과장해서 표현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자신이 좋은 집안의 출신이며, 저명 화가가 운영하는 좋은 화실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실력 있는 화가임을 자랑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그런 류의 이야기 대부분은 지어낸 것일 뿐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다소의 진실이란 것도 혼재되어 있었을 수는 있지만 상상이나 과장이 빚어낸 결과물이란 것은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사실이 그 안에 있다면 그것을 두고 ‘완전한 거짓말’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그들을 두고 ‘거짓말쟁이’ 라거나 ‘사기꾼’이라고 하기보다는 허풍쟁이 또는 그 정도에 따라서는 허언증이 있다든가, 리플리 증후군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어쩌면 그런 것들을 통해 그들은 로마라는 메트로폴리탄의 짙은 그늘을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완전하게 신뢰할 수가 없었다.

현실에서의 그들은 보잘것없는 삶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기에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쏟아내는 타인의 이야기들에 굳이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예술가로서의 실력뿐이었다.

하지만 그 실력조차도 성공을 쟁취하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한낱 잔재주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카라바조 전기: 로마의 무명화가 카라바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