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 역할은 주 2회, 학생 5-6명씩 1:1 지도이다.
그렇게 단순화된 공고를 보고 시작했어도 되는 일인가?
라는 고민을 시작했다.
안 좋은 신호라는 걸 알고 있다.
생각한 업무보다 부차적인 것들이 부담이 되고 있다는 거니깐.
언어로 합의된 단 몇 줄의 주 업무만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일을 묻는 질문에 우리는 고작 직업이라 분류된 한 단어, 길어보아야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데
일하는 것은 그에 비해 너무나 복잡한 일이다.
직원 톡방에 쌓이는 메시지는 쉬는 날에도 안 볼 수 없어 내 신경을 갉아먹는다.
쉼을 다시 on상태로 들여놓는 모든 행위가 원망스러워 극도로 온라인화 된 세상이 가끔 밉다!
비대면 시대로 더욱 가능해진 건 언제 어디서든의 수업, 팀플, 노동도 포함이었다.
또 단체라는 명목 하에 아르바이트 이상의 책임감을 가지고 싶지가 않더라.
노동에는 단절된 몇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 고민을 이어가다 다시 전환되어 오는 지점은
노동에 쏟는 것과 페이의 치환
사장 마인드로 일하라고 할 거면 사장 월급을 달라는,
또는 금융 치료와 같은 떠도는 말들을 보면
새롭게 아이러니하다.
그러니까 노동에 드는 체력적 정신적 그리고 시간적 힘듦은 페이로 정말 페이로 환전 가능한 것일까!
내가 만약 적응기에 쏟고 있는 마음에 비례하도록 내 기대에 비해 커다란 시급을 받았다면
일에 대한 깜깜한 부담감이 정말 삭 가라앉았을까
그랬을 것 같기도 하다는 속마음에 다시 묻는
버는 것의 어려움이
버는 것으로 상환되다니 그것이 사회일까!
또 벌어서 온전히 행복하게 쓸 시간이 없이 다시 일에 대한 부담으로 사이클을 돌려낸다면
금융 치료도 불가능한 걸!
아무튼
귀한 시간을 더 질 좋게 쓰고 싶기도,
노동과 쉼의 적절한 on / off를 간절히 찾고 있기도 한
사회초년생-의 초년생 경험! 을 시작하는 중이다.
실은 이렇게 생각의 고리를 엮다가도 원점은 다시 공고에 적혀 있던 주요 업무
단순화하고, 그에 집중하고, 그 외는 부차적인 것으로 넘기는 것-!
그러면 된다.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것이 어른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