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생인 나에게 전원일기는 생소하고도 남는 옛것이었다. 그런데도 22년이나 이어진 드라마라는 말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22년, ‘나’라는 사람 한 명이 만들어져 온 기간이다. 처음부터 약속한 기간이 아니라 매 회차마다의 치열한 고민이 쌓은 기록이었을 것이다. 2021년, <다큐 플렉스>를 통해 처음 접한 전원일기의 첫인상은 ‘드라마 하나가 사람 같다’였다.
“농촌 드라마가 아니라 휴먼 드라마였어요.” - 김혜자 배우
그런데 배우들도 다큐멘터리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원일기는 사람 이야기를 담은, 그리고 삶을 닮은 드라마였다고 했다. 연로한 배우가 전원일기를 삶의 마지막 과업으로 붙들고 있기도 했고, 어린이였던 배우가 몇 년간 성장하는 모습이 그대로 기록되기도 했다. 방영이 길어짐에 따라 전원일기의 생명력은 더 강해졌다. 때로는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 이 작품에 갇힐 만큼 말이다.
22년이라는 세월, 마치 한 명의 사람이라도 만들어진 듯한 막중한 존재감이었을 것이다. 이쯤에서 끝을 내기 쉽지 않은 무수한 이유가 쌓였을 것이다. 전원일기는 22년이나 이어질 만큼 시청자들에게 아주 뜨거운 사랑을 받았지만, 영원한 건 없다는 순리를 증명하듯 그 자리에서 서서히 내려와 쓸쓸히 마무리되었다. 어느 이야기에나 기승전결이 있고, 인생에는 흥망성쇠가 있다. 전원일기의 그래프 또한 자연스러웠지만, 그래서 아팠다는 게 느껴졌다. 손뼉 칠 때 떠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걸 알면서도 헤어지기 어려웠고, 마침표를 찍은 후에도 되돌아보기 어려웠음이 느껴졌다. <다큐 플렉스 전원일기 2021>이 반가웠던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서였다.
“연기자는 가슴이나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 자꾸 지워버려야 한다는데, 과거 속으로 나를 인도해주시니까 얼떨떨합니다.” - 최불암 배우
과거의 영광에 매몰될 때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전원일기’가 딱 그런, 너무 행복했기에 돌아보기 힘든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20년 후 다시 모여 전원일기를 이야기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거나 두려웠다는 말을 하면서도, 2021년에도 배우들의 눈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기억에 얽매이지 않고 앞만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비록 마지막 화까지 가장 높은 자리에서 화려하게 장식되며 마무리한 것은 아니더라도, 여러 사람의 삶이 얽혀 있던 ‘전원일기’가 쉽게 잊힐 존재였을 리가 없다. 방영된 22년 이상의 세월, 그리고 또 20년이 지난 지금. 이 세월 내내 똑같은 온도의 애정이 이어지는 건 아니더라도, 순간순간에 공유된 기억과 애정은 절대 잊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마음 한 편에 전원일기를 두고 있던 시청자들이 많이 존재했던 것, 2021년에 다시 만나 서로를 반가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20년 만에 만난 화면 속 전원일기를 반기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 아빠를 보며 생각했다. 지나간 것을 지나간 것으로만 여기며 과거를 소외시키는 방식이 과연 옳았을까. 사회는 오히려 ‘현생’과 ‘미래’에 매몰되어 있던 것이 아닐까. 기억도 인간의 기능이고 일부인데, 우리는 과거에게만 너무 야박하게 적은 자리를 주고 있는 것 아닐까.
이번 방송이 눈앞의 바쁜 현실을 쫓아가기에 바빠 ‘지나간 것은 지우기’를 서로에게 강요하고 있는 사회에서, 지난 것을 삼키고 지우기만 할 필요가 없음을 전해주었다. 전원일기를 함께했던 이들이 그때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고, 걱정을 뒤로하고 모여 다 같이 떠드는 장면들이 공동의 기억을 회복하고 치유해주는 듯했다.
과거는 분명 삶에서 여전히 기능할 수밖에 없다. 또 추억하는 일 또한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지나간 것에 대해 건강하게 뒤돌아보는 법을 잘 모르는 우리에게 <다큐플렉스 전원일기 2021>가 준 큰 메시지였다.
하루에도 ‘몇 개월 후의 나’를 몇 번씩 불안해하는 20대 초반에게도 벌써 뒤돌아보는 순간이 있다. 뉴트로, 싹쓰리, MSG워너비의 향수가 유행할 뿐 아니라 2000년대생들마저 ‘그 시절 케이팝’이라며 2세대 아이돌을 추억하는 문화가 생긴 오늘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어떤 세대가 공유하는 향수가 존재한다는 점, 누구에게나 뒤돌아보고 싶은 과거가 있다는 그 사실이 <다큐플렉스: 전원일기2021>를 따분한 ‘라떼는 말이야’로 느끼지 않고 공감하게 해 준다.
박수칠 때 떠난다는 것. 사람들을 가장 열렬히 박수 치게 한 모든 것들을 일시 정지해 두고 싶은 마음이다. 반대로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기립박수를 계속해서 하고 있지는 않아도 자꾸만 뒤돌아보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가장 뜨거웠던 박수를 그대로 정지해 두고 떠나지 못했어도 다시 모여 박수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박수칠 때에 떠나는 건 불가능해도, 단 한 번이라도 기립박수를 하던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 기억이 박혀 있어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를 치열하게 반영하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 나온 <다큐플렉스: 전원일기2021>가 누구에게나 있을 ‘뒤돌아봄’을 미련으로 치부하지 않고 더 긍정적으로 비추는 시작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