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비지비 Jun 14. 2024

전공의는 원래 힘든 거니까

첫 번째 이야기

신규 입원환자의 주치의를 맡게 되어 병력청취를 하던 중, 아래의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Buspirone 5mg-10mg    bid a pc, hs

Trazodone 25mg    qd hs

Alprazolam 0.125mg    qd hs

Clonazepam 0.25mg    qd hs

Propranolol 20mg    qd hs


'불안이 심했던 것 같고, 트라조돈에 벤조디아제핀을 두 종류나 병행하고 있는 것 보니까 잠도 못 잤나 보다'라는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진료하던 선생님은 이렇게 많은 약을 처방할 거면 왜 항우울제는 쓰지 않았던 거지?'라는 의문이 필연적으로 들 것 같다. 부스피론, 트라조돈, 알프라졸람, 클로나제팜, 인데놀 모두 우리 과에서 흔히 병용하는 약제들이지만, 증상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메인 약제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환자가 불안하고 잠도 못 잔다고 병원에 찾아오면 나는 약을 저렇게 처방할까? 단순한 불안, 불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거의 반사적으로 기분장애에 수반되는 문제가 아닌지 캐물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미 저렇게 먹고 있었다면 부스피론, 트라조돈은 끊고 항우울제를 시작했을 것 같고 벤조디아제핀도 한 가지로 줄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그래서 몇 개월 동안 약을 저렇게 먹는데도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었던 걸까...?


그렇다. 저 복용력은 환자가 아니라, 내가 레지던트 1년차 수련을 받으면서 거의 6개월 가까이 먹었던 약들이다.


이야기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1년차 수련이 마무리될 때쯤 의대 증원 사태로 개인적인 사직을 한 뒤로 거짓말처럼 불안, 불면 등의 증상이 모두 소실되어 지금은 어떠한 약 없이도 잘 지내고 있다. 그렇지만 지난 2년에 걸친 인턴과 레지던트 1년차 수련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적, 육체적 고난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내가 그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 몰랐다. 동료 전공의 중에 수련을 받으면서 맘 편히 쉬고 원 없이 자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당직을 선 다음 날이면 커피 없이는 10시간이나 남은 정규 근무를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수술장, 병동, 응급실을 정신없이 오가야 하는 더욱 '힘든' 과 전공의들을 떠올리면서, 그래도 우리는 오전에 입원환자 회진을 돌기 전에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는 걸 감사히 여길 정도로 다들 고생하며 일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매일 밤 자기 전 다섯 알, 때로는 그 이상의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도 자신의 '힘듦'의 무게를 체감하지 못했다. 


'전공의는 원래 힘든 거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