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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희 Mar 13. 2022

내 친구 현정이네 집

아이에게 짜증을 낸 날이면 문득 30년전 친구였던 현정이네 집이 떠오른다


3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오빠 , 나 , 엄마 , 아빠 우리 네 가족은 88년 서울 외곽의 도시개발 계획가 맞물려 또 한 번의 이사를 해야만 했다.  어느 주공아파트 20평 아파트 전세.


다들 부푼 꿈을 안고 내 집 장만에 성공했던 시기에 반해 우리 가족은 어중이떠중이 이사를 갔어야 했다고 엄마는 말했었다. 어쨌듯 내가 이사 간 곳은 비슷한 모습의 가족들이 많이 보이는 흔히 말하는 서민동네였다.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은 성북동 다세대 주택이었는데, 골목길의 어두침침함과 동네 개구쟁이의 활기가 넘치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내가 6살이 되던 해에 마침내  우리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얼마 후엔,  파란 1.5톤 용달에 가구며 골드스타 냉장고며 살림살이 탈탈 실어 끈을 칭칭 동여매 실어 날랐으며 우리 가족도 용달에 짐짝과 함께 끼워 타 성북동 골목을 뒤로 떠났다.


그때 , 내가 마주했던 엄마의 얼굴은 개운하지도 즐겁지도 아니 슬프지도 않은 모습의 옆모습이었고, 아빠는 어딘가 모를 날카로움과 긴장감이 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았었다.






우리 가족의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순간 미끄럼을 타고 있었는데, 강남 영동의 아파트에서 그럴듯하게 살다가 다시 강동구 길동으로 갑작스럽게 장안동 아파트에서 다시 성북동 어느 다세대 주택으로 마치 놀이공원 모노레일 쳇바퀴 뱅뱅 돌듯 우리 가족은 점차 낮은 제대로 반복 또 반복해서 이사를 거듭하고 있었다.


엄마는 지금에 말씀해주시길 , 아버지는 큰아버지에게 명의를 빌려주셨고 또 그 명의가 잘못되어 집 한 채가 날아갔다고 했다. 거기에서 멈췄으면 오죽 좋았을까. 건설사 말단 직원이었던 아버지는 돈도 백도 없지만 늘 꿈은 원대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대출은 대출대로 받아 아빠의 사촌 형이란 사람에게 오직 혈육이라는 점 그 하나로 홀라당 속아 , 그야말로 쓰레기 매립지였던 장안동 어느 아파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살 수밖에 없었다.


 불어오는 쓰레기 먼지를 참지 못한 엄마는 아빠에게 베란다 새시라도 하자고 했지만, 일언지하 돈이 어디 있냐며 거절당했다고 한다.

돈이 문제고 왠수인 것이다.


당시 오빠는 호흡기가 매우 안 좋았는데 자식을 위해 새시도 할 수 없는 엄마의 화와 원망이 그때부터 잠재되었고 , 늘 다혈질에 제멋대로 하는 아빠와 엄마의 관계는 늘 수평선인 듯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다가 아빠의 압도적 화로 마무리되는 게 수순이었다. 엄마는 늘 힘들어했다.


한 달 벌어 한 달을 살아내는 퀘스트의 연속이었으리라. 아빠의 무모함과 함께 엄마의 체념과 원망이 뒤섞여있는 상태로 , 결국 어느 아파트에 정착은 하게 된 우리 가족이었다.




어느덧  8살이 된 나는 단지 인근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우리 가족도 생활이 빠듯하지만 안정되어 겉으론 안정된 모양새가 되었고 아파트 단지 아이들은 모두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해 친구들도 조금씩 생겨났다.


나는 입학 당시 키가 제법 커서 맨 뒷자리에 앉곤 했는데 나와 키가 비슷하게 컸던 친구들 중 하나와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내 첫 단짝이자 짝꿍. 바로 옆 동에 살았던 그 아이. 유난히 하얀 피부에 짙은 쌍꺼풀 , 곱슬머리 반 묶음 하고 남색 멜빵 치마가 잘 어울렸던 친구.

근 한 말투로 내게 말을 걸어주었고 깍쟁이인 듯 발랄한 그 친구는 나와 이내 절친이 되기에 충분했다.  바로 내 친구였던 현정이. 신현정이라고 또렷이 기억한다.


현정이는 외동딸이었다.

기억하고 싶은 추억은 알아서 머릿속에 자동 저장이 되는 것일까. 처음 만난 절친 현정이에 관련된 기억은 아직도 그대로다.


외동딸에 귀하게 자라 늘 사랑만 받던 현정이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 까지도.

 간혹 현정이와 나사이에 끼어들어 투닥하기도 했던 친구 지라는 친구도 기억이 난다. 그 시절 나는 자주 현정이네 놀러 갈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집 옆 동 1층에 살기도 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외동이라 무척 심심해했던 것이 분명하다. 현정이는 하교 후에 매일 나를 꼬셨다. '우리 엄마가 떡볶이 해준데 놀러 가자.'라면서.


왜 인지 모르겠는데 친구 집에 자주 가는 걸 엄마는 참 싫어했다. 심지어 옆라인에 사는 언니가 교회에 놀라가자고 하는 걸 절에 다니는 엄마는 절대 허락을 안 해주셨는데, 여하튼 그런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정말 꾸준히 그 집을 갔다.


처음 보았던 가족의 형태에 놀라면서도 안정감을 느껴서였을까.


현정이네 집은 현관을 들어서자 다정한 공기가 나를 압도했다. 우리 집과 평수도 같고 구조도 같은데 다른 나라 궁전에 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색깔로 표현하면 우유섞은 부드러운 핑크가 딱일 것이다. 그리고 현정이는 핑크빛 공주방을 가졌었다. 현정이가 외로울까 늘 친구를 반겼던 현정이 엄마. 그리고 다정한 현정이 아빠의 반김까지. 나는 해외여행 처음가 두리번대는 초보 여행자처럼 현정이의 집 분위기를 읽고 또 읽어 애써 감추어야만 했다.


재밌는건 현정이 아버지는 얼굴은 80년대 씨름선수 이봉걸을 연상케 했다. 그 아저씨는 키도 컸지만 얼굴 골격이 무척 컸는데 , 웃을 때 사나운 세모눈이 반달이 되고 광대가 위로 솟구쳐서 하회탈을 많이 닮았었다.


그런 첫인상과는 달리 현정이에게 둘도 없는 다정한 아빠였다. 얼굴 근육이 사랑으로 뒤엎여선지 무서운 얼굴이지만 무섭지 않게 느껴졌다고 말하면 이해가 될까. 그저 사랑만 품고 사는 가족. 이 집에서 살면 사랑만 듬뿍 받아 좋을 것 같은 생각. 처음으로 8살 현정이가 부러웠다. 오빠와 나눌 것도 없이 늘 풍족하게 먹고 쓰고 부모님의 사랑만 가득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현정이네 집에 가면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매일매일 간식이 가득했고 현정이가 주문했던 떡볶이는 매콤하면서 달콤하게 우리를 기다렸다. 8세 소녀에게 천국은 따로 있었겠는가. 현정이네 집이 천국이고 부러움의 대상이었겠다.


현정이 아빠는 우리가 집에 들어서면 늘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우릴 맞이해주었다. 절대 화를 내는 법이 없었으며 , 귀찮음 없이 한결같이 자식을 알뜰살뜰 챙기는 아버지계의 이상형이라면 그 아저씨였겠지 싶다.


더불어 살갑게 날 챙겨주시던 현정이 엄마까지 3 식구는 늘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하 깔깔 웃음이 떠날 날이 없었다. 친구인 나까지 마치 가족처럼 대해주셔서 이 기억은 온전히 남아있는데, 한 번은 그 집 화장실을 갔다 오면서 바라본 거실의 현정이 가족은 마치 액자 속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현실 속의 비현실. 어린 8세 소녀였던 나 스스로가 이방인처럼 소외감이 들어 집으로 귀가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우리 집은 15층 꼭대기. 현정이는 1층. 현정이 집을 나와 우리 집 현관문을 들어가면 느껴지는 공기의 냄새도 반대였다.


지금의 엄마와는 다르게 어딘가 날카롭고 지쳐있던 엄마. 여유가 없었던 살림과 가정 저하 곤 거리가 멀었던 아빠에 실망감이 컸던 탓일지도 모른다. 거실에 놓여있던 갈색 우단 소재 3칸 소파에 길게 누워 잠을 자던 아빠. 왜 우리아빠는 현관에서 날 반겨주지 않아? 왜 맨날 자고 있는 거야.


아빠는 그 당시 애연가였다. 우리가 있건 말건 간혹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다가 담배에 불을 켜고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얼굴 찌푸리시며 베란다 문을 열던 엄마의 고단함은 늘 한 세트였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반갑게 나를 반겨주고 간식을 챙겨주는 아빠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다.


지금에 아빠는 먹고 사느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 당시 다정했던 아빠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적어도 내 유년시절엔. 아빠의 얇은 귀는, 저축했던 돈도 하나 있던 강남의 집도 운 좋은 어느 누군가의 손에 쥐어주게 되었고, 단벌 원피스로 두 아이를 이끌고 낮에는 살림 밤에는 술에 취하신 아빠의 푸념을 들어야만 했던 엄마는 두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기엔 버거웠으리라. 삶을 살아내여야만 했고 , 돈은 곧 전쟁이었으니까.




"엄마 나도 떡볶이 해줘. 현정이네 집에서 떡볶이 했는데 맛있었어."


엄마는 늘 거절했다.

 ' 에휴.. 무슨 떡볶이야....'가 돌아오는 대답이었는데 엄마는 이유 없이 자주 짜증을 내곤 했고 기분이 좋을 땐 한없이 좋다가도 아빠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지면 여지없이 우리도 눈치를 보았다. 그래도 나는 왜 현정이네의 떡볶이가 우리 집에서도 기어코 먹고 싶었던 걸까. 아마 부러웠긴 어지간히 부러웠나 보다.


몇 번을 조르고 졸라 만들어줬던 우리 엄마의 케첩 떡볶이. 드디어 우리 엄마도 떡볶이를 해주신다면서 방방 뛰다가 이내 맛없는 케첩 범벅 떡볶이에 말도 못 하고 눈치 보며 남기고 말았던 그 애처로운 떡볶이. 그리고 현정이네의 매콤하면서 달큼했던 떡볶이가 겹쳐졌다. 그리고 다시 현정이가 부러웠었다.


한 해가 가기 전, 이내 현정이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떠났다. 마지막까지 다정하게 웃어주시던 현정이 아빠. 그리고 우린 다시 못 만난다면서 울던 현정이. 그렇게 아주 가끔 그 동네를 지나갈 때면 떠오르는 추억이 되었다.




나는 다정한 엄마가 되고자 했다. 결코 삭막함은 남겨주지 말자. 무뚝뚝한 엄마보다 늘 살뜰하게 널 챙겨주겠노라 다짐했다. 결코 삶의 고단함이 날 덮칠지라도 너 하나만은 내가 사랑으로만 널 안아주겠노라고 말이다.

그러던 엊그제 딸이 내게 물었다.


"엄마 나 팬케이크 먹고 싶어. 팬케이크 맛있데."


6살 딸아이의 뜬금없는 주문. 바쁜 남편을 대신에 집안일에 전전긍긍인 나는 무뚝뚝한 어조로 아이에게 말해버렸다.


" 무슨 펜케이크야. 우리 집엔 펜케이크 가루가 없어 있는 과자나 다 먹어."

"...."


이내 딸아이의 침묵이 흐르고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내 주위를 서성인다. 그리고 난 무뚝뚝하게 대꾸를 하지 않았고 아이의 바람을 모른척해버렸다. 얼마 후 설거지를 하다가 후회했다. 앗차 싶었다.

무의식 중에 버릇이 다시 나온다고 아이에게 내 잠재된 슬픔을 다시 물려준 격이 되지 않았나. 팬케이크 사다 구워주면 될 일을 굳이 신경질 내고 거절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아이가 느꼈을 실망감과 스스로 해냈을 체념을 생각하니 이내 슬픔이 몰려왔고 기억이 돌고 돌아 현정이네를 가던 8살 그 시절의 쓸쓸한 내가 떠올랐다.


 혼자 백도 뭣도 없이 회사 말단 직원으로 자식 둘을 건사해야만 했던 아버지의 고단함 , 그리고 날카로운 아버지의 곁을 갈 수도 만져볼 수도 없었던 거리감이 온전히 생각났다. 우리 아이가 느꼈을 실망감은 그 시절 내가 느낀 실망감과 체념을 그대로 빼다 박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도 같이 다가왔다. 아버지가 피워대던 담배연기 속에 자욱했던 거실의 공기처럼 탁했던 집안의 분위기는 지금과 다를 것도 없다.


나는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한다. 부모가 된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땐 그랬다는 이야기다.

아버지의 독단적이고 가부장적인 그리고 다혈질의 성격은 엄마에겐 그늘이었겠다. 어린아이의 떡볶이 주문은 번거로운 작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팬케이크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문득 떠올랐다. 왜 우리 아빠는 맨날 잠만 잘까. 우리 엄마는 왜 떡볶이를 만들어주질 않는 걸까. 왜 우리 엄마는 나에게 무섭게 대했던 것일까..


그래서 나는 다시 아이에게 대답해주었다.


"내일 엄마가 마트 가서 팬케이크 가루 꼭 사 올게 우리 같이 반죽 놀이해볼까."


신이 나 방방 뛰는 아이 얼굴을 보면서 나의 죄책감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덜어졌길. 그리고 아이의 사랑은 충만해지길 바란다. 이제 먹고살만해지고 이런저런 힘든 일을 겪고 나니 부모님에게 젊은 시절의 절박함이나 좌절 체념 같은 그때의 모습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그 기억은 나에게 남았고 행복하고 다정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나는 아이에게 어찌 대해야 할지 가끔 방황하곤 한다. 다정하게 말하고 사랑만으로 대하고 아이의 실수까지 사랑하는 여유로움. 스스로 자괴감이 들 때마다 8살의 내 친구 현정이와 현정이의 부모님이 가끔 떠오른다.  아직도 해맑은 모습으로 잘 계실까. 문득 궁금해진다. 아마도 기억 속의 좋았던 모습처럼 잘 계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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