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배
내가 사는 동네는 도심 속의 공원이다. 느지막이 찾은 삶의 터전에서 아침저녁으로 걷다 보면 멀리 보이는 산이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고 새는 새벽을 노래하고 각가지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길 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소중한 풍경이 일상인 곳이다. 나는 가끔 방향을 바꾸어 대학로로 내려가 부지런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을 찾아 간단한 아침식사를 즐기기도 한다.
어느 날인가 꽃가루가 날리는 오후에 평소처럼 슬금슬금 젊은이들의 표정을 살피며 걷고 있었다. 뉘 집 딸이 저리도 밝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 삼삼 오오 떼 지어 길거리에서 먹고 마시며 무리 지어 다니는 그들에게 참 자유란 무엇일까. 몇 번을 보아도 충격적인 진한 애정 표현은 언제나 익숙해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허락된 햇빛을 즐겼다. 갑자기 낯익은 모습이 들어온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그 부부를 바라보는 것만도 왠지 특별한 오후의 선물 같은 느낌이었다. 서둘러 동생에게 전화를 했고 동생은 사진을 찍어 전송해줄 것을 요청했다. 한낮의 파파로치가 된 셈이었다. 잠시 망설인 후, 차로 다가가 사진한 컷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부탁했다. 그 유명인은 어느새 차 속에 들어가 있었다. 정중한 매너로 힘들겠다고 말씀하시는 초로의 남성분에게 실례했다며 뒷걸음질해서 돌아오는 길이 조금 씁쓸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그날 만난 그녀는 무척 도도하고 표정이 없었다. 오래전 이긴 하나 파리의 하늘 아래서 그 부부와 함께 스타와 팬의 관계였을지언정 꽃을 중앙에 두고 와인을 마셨던 작은 테이블 위의 시간을 나는 기억한다.
그날 이후 지인들과 함께 한 편의 연극을 보았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엄마와 딸과의 소소하고 행복한 시간과 때로 일어나는 갈등을 다루고 흥을 돋우는 몸짓 등 원로 배우의 명품 연기가 함께한 알찬 구성 덕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돌아보니 연극의 정점을 찍은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딸에게 조차 알리지 못하는 엄마의 비밀이었다. 그것은 엄마가 과거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치매였다.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딸을 알아보지 못하는 비극.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을 적시는 먹먹함. 아름다웠던 봄 날을 기억하며 떠나는 엄마의 죽음은 텅 빈 하늘에 어두운 그림자만 비치는 우리들의 모습인 냥 쓸쓸한 엔딩이었다.
연극을 관람한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 30년도 전에 함께 여행을 했던 친구를 만나 대학로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나는 흥분했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난날 대단했던 그분은 이미 중증 치매 단계이고 가까운 분은 이미 알고 있는 비밀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아름다운 여 배우는 그렇게 망각의 배를 타고 떠나고 있었다. 결코 사람을 무시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약 없이 꾸밈없이 홀로 떠나는 배 위에 오른 여인의 눈빛이었다. 그녀는 떠나려는 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