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에 갑자기 엄청난 눈이 퍼부었다. 30 분이면 닿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려 집에 도착하는 악천후다. 거리의 사람들도 모두 얼떨떨한 표정으로 당황한 듯 조심스레 걷는다.
겨울의 참 멋은 역시 눈 나라 설국 여행 아니던가. 아주 잠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맞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소복이 쌓인 눈을 바라보노라면 나의 내면조차 정화되는 듯하고 가까운 이가 내게 소식을 전하는 듯한 하늘을 향해 미소 지를 땐 더 이상 긴장이 필요 없는 듯 그냥 좋던 때가 있었다. 무방비 상태로 자연에 더욱 밀착되고 싶어 흰 눈밭에 열 십자로 누워 보기도 하지 않았던가.
흐르는 세월에 내가 변하듯 자연 또한 그러한지 지난여름, 내리던 비도 빈번한 천둥 번개를 동반하여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어쩌나, 오늘은 누군가 억울한 일을 가슴에 담다 담다 터뜨린 울분처럼, 후려치는 듯 거센 눈발이 나를 아프게 한다.
한 겨울 눈이 내리면 강아지도 나오고 동네 친구들과 함께 눈사람도 만들며 싸움이라 이름한 눈싸움 또한 가족들의 웃음꽃이 피던 아름다운 정경으로 기억되고 있다. 장독대에 쌓이던 10센티 정도 높이의 눈은 멀어져 간 유년의 날로 나를 이끈다. 이름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막다른 골목집이 떠오른다. 친구들과 같은 반을 하지 못해 훌쩍거리던 초등학교 입학식날의 빨강 치마와 검정 구두. 길고 긴 두루마기를 입고 오시던 할아버지의 지팡이도 눈 위로 함께 걷는다. 이젠 나도 지팡이가 필요한 나이.
힘겹게 전쟁터를 빠져나오니 아파트 단지 내에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초등학생 형이 뒤에 따라오는 자신보다 어린 소년에게 말한다.
‘내가 사람 함부로 믿지 말라고 했지.’
전후 사정을 모르겠으나 가던 길을 멈추고 뛰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나의 유년 시절 눈 나라 여행은 끝이 났다. 내리는 눈을 헤집고 올라오느라 발도 무거운데 마음 또한 개운치 않다.
산람이 소중하다. 사람이 희망이다.
우리의 믿음과 신뢰는 어디로 떠났을까. 사람의 소중함은 또 어디로 사라졌을까? 왜 나는 그 순간 물질적으로 많이 부족한 나라의 오지 속 삶을 사는 어린이가 생각났을까? 강을 건너야 학교에 갈 수 있고 강을 건너기 위해 외줄을 타야만 하는 그들의 등 뒤에는 가방이 들려있다. 외줄 위의 어린이들은 한마음이 되어야 무사히 안착할 수 있다. 한 마음은 상대에 대한 철저한 믿음의 다른 말이 아니던가.
그곳을 삶을 잠시 들여다본 후 나는 맑음. 희망. 신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물론 제한적이긴 하나 명품을 입고 들고 먹고 외국어와 미술지도를 되도록 일찍 받는 것이 보장된 미래로 가기 위한 단계라고 생각하며 엄마도 어린아이도 바쁜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사람을 믿지 말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으며 왜 오늘 내리는 눈이 폭탄처럼 내리는지 알 것 같다.
젊은 날 우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알게 본다.
김용택 시인의 ‘그 강에 가고 싶다’를 조금 발췌해 본다.
“그 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기뻐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
물이 산을 두고 기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