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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조 Oct 09. 2024

최초의 고백


최초의 J와 만났다. 


내가 7개월간의 네덜란드 유학에서 돌아온 뒤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내가 그를 왜 최초의 J라고 부르냐 하면   물론 내 주변의 몇몇 J들 중 그 사람보다 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없기도 하고,

아마도 내 그들 중에 한 명만 고르라고 하면 그가 가장 J에 잘 어울릴 것이기 때문이다 ㅡ 본인이 동의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작고 오래된 J의 작업실에서 J를 만났다.

좁은 벽돌계단과 그만큼 좁다랗게 난 잔디를 스치며 지나가면 철문이 나온다. 그 안에 집인지 작업실인지 다락방인지 알 수 없는 곳이 있다. 

그런 곳을 나는 몇 가보았다. 뉴욕에서의 J의 방과, 어둑한 지하에서 열렸던 J의 전시장 같은 곳들

작은 음식과  느른한 다리  찌뿌둥한 눈동자와 허옇고 묘한 고립 의 공간들



기억나는 것들은 



9시간 동안 J의 영상 편집을 돕기 ㅡ 아주 큰 바닐라 라떼와 아주 단 초콜릿 빵
화장실을 가려면 긴 통로를 지나야 했는데 그게 너무 깜깜해서 무서웠다는 것
8시가 넘어서 저녁으로 함께 먹은 도미노 피자는 뻑뻑한 눈과 생뚱맞은 소파와 잘 어울린다는 것
J가 내가 쓴 글귀를 넣어 만든 영상을 나한테 보여줬을 때의 느낌



같은 것



J는 나의 블로그를 알고 있고 내가 네덜란드에서 적은 글귀들을 알고 있다 ㅡ 사실 그럴 줄 몰랐는데


내 글은 나를 많이 닮았고 그  '나'는 사실 아직 네덜란드에 다다르지도 못했다. 

(그렇담 아마 스물두세 살 정도  ㅡ  글 속의 나는 몇 배는 느리게 자란다)

내 글에는 대학에 들어와서 어느 인디 밴드의 음악에 푹 빠져  그 환하고 찬란하고 알록달록한 모닥불 같은 색깔에 목말라하던 내가 있다.

좋아하는 사람들의 속눈썹 하나 손목의 곡선 하나 불규칙해서 아름다운 웃음소리 하나에 눈은 크게 열리면서도 밖으로는 수줍어하는 내가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좋아하게 된다면, 당신은 나를 기억력이 아주 좋은 사람으로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아닙니다. 나는 기억력이 아주 나빠요.  당신이 형제자매가 있는지 없는지  다음주에 강원도를 가는지 전라도를 가는지는  5초만에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투, 웃음 같이 당신에게서 좋아하는 것들을 잊지 않을 뿐이고, 

다만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거예요







김혜순 시인의 책에는,

시인은

어떠한 순간이나 대상과 미리 작별하면서 그것을 쓰는 사람이라는 말이 나온다. 


초등학교 때부터 낙서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는 잉크펜으로 그 부분에다가  우와 알 것 같아 라고 쓰고 나에게 글은 예언 같다고 썼다.

이것을 너는 욕망하게 되고, 기억하게 되고, 흡수하게 될 거야   라는 예언이었다. 무언가를 보고, 눈이 크게 떠지고 커피를 마신 뒤처럼 마음이 울렁 철그렁 하는 것이 느껴지면

그런 예언 같은 글을 썼다 ㅡ 좋아하게 될 것들, 그것을 좋아하게 될 나에 대해서. 


나는 작은 시 모임에서 같이 시를 읽고 쓰고 있는데, 그 중 친구 S가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맛있는 청포도를 아삭하고 불투명한 것으로 정의하는 사랑스럽고 용감한 시인.'


간질간질 기분이 좋았다.   맞아  나는 아삭하고 불투명한 청포도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런 식으로

읽기 쉬운 시나 암호처럼 썼다. 그것들이 나를 이루고 나를 설명하고 나에게서 멀리 날아가 닿도록.



어느 날의 꽃다발이 좋았다. 

집에 가는 길에 보들보들한 이파리를 매만지며 여러 번 웃음을 터뜨리듯 신기해했고, 
까슬하고 부드러운 빛깔의 종이를 자주 바스락거렸다.  


어느 나라의 젖은 공원이 좋았다. 

무당벌레와 새를 좋아하는 당신이 '장미 냄새를 맡으려고 멈추지 않으면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한다' 던 말이 내게 오래오래 남아있었다.


네덜란드에서 빨래를 하고, 식물에 물을 주고, 물을 건너 장을 보러 가는 일상이

때로 슬퍼질 만큼 그리워질 것을 알고 있었다.



J는 그렇게 둥둥 떠다니는 내 문장들을 가져다가 영상을 만들었다. 얼핏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깔의 곱슬머리를 한 여자가 영상 안에서 말하고 있었다.


'화분에 물을 주는 날이 수요일에서 토요일로, 다시 월요일로. 

빨래를 하는 날이 수요일에서 목요일로 그리고 다시 화요일로 바뀌고 있어.'


피곤한 얼굴을 쓸어올리며 난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겠어, 덧붙이는 여자를 보고 

나는 눈 크게 뜨고 놀라워하고 있었다.

영상 속의 낮은 나무 탁자와 흐릿한 햇빛   곱슬머리와 피곤한 눈가   어느 영화의 색깔로, 시를 읊듯이 말해지는 내 문장들 




ㅡ오늘로 글 써도 돼?  아 근데 사진에 영상 정보가 다 나오는데    ㅡ모자이크 하면 되지!




9시간이 지나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낮의 좁은 벽돌길과 풀숲은 모두 어두워져 있었다. 

밤 공기가 시원했고, 한적한 동네라 도로가 검고 깨끗하고 텅 비어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거리 사진을 찍는데 J가 물었다.   - 왜 가로로 찍어? 보통 세로로 많이들 찍지 않나?


사실 그때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마 이유는


저기 가로등 위로 나뭇잎이 얼룩진 색깔이랑,

안쪽 골목길에 흐릿하게 서 있는 오토바이가 뭔가 옛날 80년대 영화 같아서 저게 다 나와야 돼,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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