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이 문장을 쓰고 아주 오래 앉아 있다
저는
사실 감정에 아주 예민하고 또한 무딘 사람인데요 그래서 아주 느리고 서툴고 기이하게 감각하는 적이 많았습니다
슬프고 잔인한 영화는 잘 보면서도 ㅡ 어린 암환자들의 이야기는 못 보고
그런 이야기를 보고 너무 많이 울면서도 ㅡ 전애인과 대화하면서는 '그게 왜 서운하지...?' 이해가 안 돼 자주 어려웠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그 어떤 죽음도 함부로 소비하고 싶지 않고 이것은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할아버지에 대해 쓴 글은 손 안에 꼽는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 말하고 싶어질까
안돼 하지 말자 하면서도
그리고 왜 나는 자꾸 꾹 참듯이 말하지 않으려고 할까?
어렸을 적 대부분의 나의 기억은
두리번거리는 눈
에서 비롯한다.
내가 나온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거의 몇 걸음 거리에 도독도독 붙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9년 동안 같은 길을 걸었다.
그 길 위에는 굴러 넘어져 내 무릎에 길고 도돌한 흉터를 남긴 무안함도 있었고 나의 가장 어린 친구들과 아지트를 고르던 낄낄거리는 소리도 있었다.
가장 짧고 단편적인 순간은 늘 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다.
중학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겨울의 아침들을 기억한다.
바삭거리고 말라붙은 봉오리에 작고 봉긋하게 쌓인 눈 시퍼런 공기의 달 밤이 아직 물러가지 않은 색의 교실 같은 것들
을 지나치지 못하고 어린 사진을 찍었던 내 눈을 기억한다
두리번거리던 눈으로 보았던 거대한 집
그 집은 내가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유일한 집이었다.
그곳에서 친척들은 자주 모였었다. 거기서 나는 동생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어린애였고, 나는 이 동생들을 이끌고 집 안에서 숨어다녔다. 숨이 넘어가도록 깔깔거리면서
할아버지의 이층집 저택에는 화장실은 3개, 방과 창고는 7개나 됐기 때문에 (잠겨 있는 방 하나를 빼더라도) 사실 숨을 곳이 아주 많았는데 나무 계단 아래의 광은 이상하게 서늘한 곳이었다 ㅡ음식을 보관하기에 좋은 곳이었던 거겠지 라는 말은 그 당시 우리에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무섭고 황당한 꿈처럼 그곳을 피했다.
우리가 이불과 방석을 모두 끌어모아 쥐새끼처럼 숨어드는 곳은 응접실 같이 커다란 부엌에 딸린 작은 창고였다. 그 조그만 방에는 미약한 형광등이 있었고, 그 아래는 쌀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물건과 음식들이 가득했다.
이를테면 그곳은 태초의 장소였다
어른들이 밥을 지을 때 이곳에서 무언가를 퍼 가고, 무언가를 렌지에 돌리고, 무언가는 다 이곳에서 나오고
그렇게 식탁 위에 왁자한 점심과 저녁이 차려지는 곳
나와 동생들은 그 방의 찬 바닥에다가 이불과 방석을 깔아놓고 제각기 몸을 웅크리며 키득키득 낄낄거렸다. 거기서 우리가 했던 것이라고는 한 명씩 차례를 정해서 냉장고로 몰래 가는 일이었다.
어른들의 다리와 웃음기 띤 눈이 꼭 우리를 못 본다고 상상하면서
그 아래로 기어가 노랗고 네모난 치즈를 하나 훔쳐와서 그걸 다같이 나눠먹었다.
우리는 우리를 박쥐라고 생각했고, 치즈나 때로는 작은 야쿠르트를 숙련된 솜씨로 훔치는 일을 자랑으로 생각했지만
우리는 그 방의 문을 항상 조금 열어두었다. 그리로 어른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 하얗고 밝고 강한 형광등 빛이 새어들어왔다.
내가 처음으로 가본 장례식은 스무 살 때
친구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그때 내 머리는 귀 언저리까지 싹둑 짧았고 부시시했다. 엄마에게 조언을 들었을 친구의 연락을 받고 나도 똑같이 엄마에게 뭘 입어야 돼? 물어가며 까만 슬랙스에 까만 셔츠, 까만 자켓과 까만 구두를 입고 버석한 얼굴을 하고 나왔다. 중학생일 때부터 쭉 몰려다니던 친구들 세 명이 나랑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장례식장에 와 있었다. 우린 다 어린애들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는 생각보다 무난하고 심상해 보여서 나는 괜히 어떤 감정을 얼굴에 써야 하는지를 고민하다가 나 오늘 머리 뻗칠까봐 드라이도 하고 왔어, 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 네 명이 함께 식탁에 앉으니 우리는 먹고 떠드는 일이 제일 몸에 잘 맞았다. 육개장을 먹고 일회용 접시에서 고기를 집어먹었다. 소리를 낮추어 함께 다녔던 학교 이야기를 하며 떠들었다.
2년 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1년 전에는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즈음엔 자주 생각했다. 아무도
이 나이가 처음으로 죽음에 가까워지는 나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고
나는 죽음의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어린애였다. 스무 살은 진작에 넘긴 나는 그 세계의 일원이면서 갓 걸음마를 뗀 어린애였다.
나는 슬픔과 관성 사이에서 움직였다.
일회용 접시에는 수육과 송편, 동그랑땡, 김치, 귤을 놓는다 일정하게 놓는다 그것들을 나르고 탁자 위의 비닐을 벗기면 새 것이 된다. 초록 빛의 소주와 사이다, 노란 캔의 식혜를 둑둑 나열한다
나도 어른이지만 어른들이 바쁘면 내가 어른이 된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지만 손님들 앞에 앉는다 불투명하고 새 것인 비닐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내가 받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웃는다
아직 어린애인 나 그리고 내가 입은 까만 옷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웃었다.
나는 새로 배운 말을 연습하는 어린애였다. 죽음이 장례가 슬픔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내 눈은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나는 슬프지 않아 보이는 내 시선을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도, 가족들과 손님들에게 보이기 위해 슬픔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응당한 슬픔이며 사랑일지라도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그 중간 즈음에서 웃었다.
하루는 나는 슬픔 바깥에 있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다섯 딸들과 아들들이 할머니의 동영상을 보면서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나를 이방인처럼 느꼈다.
나는 두리번거리는 눈으로,
모여 앉은 고모들의 얼굴에 있는 슬픔의 근육들을 관찰하는 이방인이었다.
그건 슬프다 슬프지 않다의 감각이 아니라 내가 죽음을 감각하는 방식이었다
모두 떠난 뒤 한밤중의 장례식장에서 아빠가 엄마, 하고 부르던 목소리의 공허감에 으스스 몸을 떨던 것처럼.
뻣뻣한 일회용 접시에 수육과 귤과 김치와 동그랑땡을 담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이야기하고
비닐을 벗겨 새 것으로 만들고
접시를 치우고 다시 그것과 똑같은 접시를 만들어도
몇 개를 만들고 음료수를 몇 캔을 꺼내도 몇 번을 양말 신은 발로 돌아다녀도
장례식장에서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른다.
지하의 공간은 늘 환하고 강한 형광등이 밝히고 있고, 영원한 빨간 디지털 시계의 숫자는 꼭 꿈 같다.
나는 사진 옆에 앉아 있었고 피어오르는 향 연기와 부러진 막대를 보고 있었고
흰 항아리에 담긴 국화를 보고 있었고 안쪽 방에 앉아 있었고
빨간 디지털 시계를 보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지 않았고
나는 내가 죽은 것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이미 죽어서 이곳에 와 있는 거라고 죽어 오게 된 곳이 이곳이라고
두 번의 장례와 6일 동안,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아주 어두웠다.
환하고 강한 형광등의 하얀 빛은 모두 사라지고,
어릴 때 고속도로를 타고 깊은 산과 어둠을 넘어 길을 떠나던 작은 국내여행들처럼 어둑한 길을 차를 타고 갔다.
나는 그 길 위에서만 울었다.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울었다.
점점이 음음하고 둥근 빛들만이 있는 어두운 밤의 도로 위에서,
이제는 울어도 나 혼자이므로
그 누구 앞에서도 소비되지 않고, 내 안에도 그걸 소비하려는 마음이 없겠구나 하는
어린애의 새까만 안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