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R에게 이야기를 하다가 그랬던 것 같다.
이탈리아의 R은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 ㅡ 늘 고요하고 차분한 눈동자의 R과 처음 만난 날에는 학교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시험 공부를 같이 한다고 만나놓고
긴 복도, 빈 강의실에서 주구장창 다리를 꼬고 나른한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가고 싶은 곳들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서로 나라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R에게 그리스와 벨기에 .. 그리고 그 외에도 수많은 나라들을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R은 나에게 'the girl from ipanema' 라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여전히 내 재생목록에는 그 앨범이 주황색 알록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남아 있고ㅡ)
ㅡ네가 너무 여행을 많이 다닐 것 같아서, 만날 수나 있을까 몰라
ㅡ그러게, 정작 암스테르담에는 많이 없으려나
그래서 나는 여행을 다녀오면 R에게 연락하고, 어쩐지 꼭 돌아왔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R을 만났다.
내가 잘 지냈냐고 물으면, R은 만나자는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만난 R은 톡 튀는 색의 옷과 여전한 뉴스보이 가방과 가죽 외투
조각상 같은 짧은 머리를 한 R은 조금 까무잡잡하게 탄 얼굴로 희게 웃어보여서 나는 내 얼굴의 색을 따라 짐작해보았다.
ㅡ네 여름은 어땠어? 여행 많이 다녔어?
하는 R의 물음에 나는 한달 동안 다닌 나라들을 떠올리며 읊어내는데
그리고 몬테카를로 ... 말하자 R이 그건 나라가 아니잖아 하고 차분하게 웃었다. 맞아 나는 모나코는 모르고 몬테카를로만 알거든
그러다가 R과 몇 가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R의 영화는 조용하고 차분한 노인과 숲에 대한 이야기였고, 내가 얘기한 것은 <레베카> 였다. 내 몬테카를로는 모나코에 있지 않고 레베카에 있었다.
아마도 나의 모든 여행들이 그렇게 이루어진다.
어느 소설에 밀라노와 피렌체가 나왔기에 그곳을 찾아갔다가
밀라노에서는 조금 눅눅함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아는 거라곤 영화 초반의 눈부신 몇 장면뿐인 곳을 또 목마름처럼 찾아가는 여행들이었다.
그래서 왜 몬테카를로를 갔냐면 (가야만 했냐면) ,
거기 <레베카> 에 나오는 이름 없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부드럽고 노릇노릇한 햇빛이 잊히지가 않았고,
그렇게 노릇한 색의 발코니와 이국으로 삐죽한 곳에서 홀로 금발을 쓸어올리며 서 있었던 사람
그가 수영하던 바다와 그 앞에 눈부셨던 빛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찾아간 몬테카를로는
제비들이 나선을 그리며 나는 나라였다.
크림색의 언덕길과 건물들 너머로는 쇠와 유리로 만든 빛이 눈부시게 번쩍였고 그 뒤에는 머언 산과 가까운 초록빛의 나무들이 빛을 발하는 곳이었다.
몬테카를로에 머무는 동안 나는 매일 바다를 갔는데 어김없이 가는 길에는 열기 어린 영화 같은 햇빛이 내리쬐고 제비들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내가 간 이름 모를 해변에는 타코와 칵테일을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었고 나는 꼭 두 시간 동안 수영을 했다.
먼 시야에서는 자꾸 물속으로 뛰어드는 환한 웃음과 몸이 보였고 이른 저녁까지 바다 속에 있으면 흰 달이 새파란 하늘 위로 유영하는 것이 보였다.
가까운 시야에서는 투명하고 높고 견고하고 근사한 건물의 유리창이 보였는데, 그 빌딩들이 멀리 있는 산 앞에서 선명한 모습이 신기루 같아
가끔 눈을 감고 물 위에 떠 있었다.
여전히 환한 저녁 8시이지만,
해가 조금 흐린 빛으로 변할 때즘이면
젖은 몸과 유쾌하게 후들거리는 맨 다리로 모래를 밟고 나왔다.
그 상태 그대로 왔던 길을 돌아가면 금세 몸의 물기는 꿈처럼 날아가고 그곳의 거리에서는 수영복을 입고 걷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낮에는 자주 건조하게 마른 몸으로 머언 열기 어린 햇빛을 받고 서 있었다.
몬테카를로에 온 첫날 나는 <레베카> 의 이름 모를 그가 서 있었던 발코니와 비슷한 발코니들을 찾아다녔는데, 꼭 그 사람처럼 몸을 기대고 서 있으면 가끔 수트를 입은 사람들과 시원한 옷을 입은 화려한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 갔다.
이상하게도 근사한 수트는 이곳과 극단적으로 어울리지 않고 또 동시에 가장 어울렸는데,
몬테카를로의 그런 묘함 때문에 머무는 내내 나는 그곳을 맞춤양복과 수영복, 유리와 쇠, 산과 물의 나라로 호흡했다.
하루는 그런 축축한 몸을 호텔까지 끌고 온 날이 있었다.
몬테카를로는 한 달 여행의 절반 쯤에 다다른 곳이었고, 그곳에서는 열기 어린 햇빛 아래에서 눈을 감는 일과 한낮 내내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나와 유난히 맛있는 저녁을 먹는 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핸드폰이 바닷물에 침수가 됐다.
평생 한국에서 살다가 네덜란드에서 고작 몇 개월 지낸 동양 여자애가 타국에서 혼자 여행하는 것
나는 로마를 다니면서 그게 얼마나 취약하다는 의미인지 지겹도록 겪었고,
두어 번 정도 무너졌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볼 생각은 가차없이 버려버리고
간신히 숨을 골랐고 또 간신히 오는 길을 기억해내 간신히 먹을 것을 사들고
어두운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수영복도 벗지 않은 축축한 몸으로 의자에 앉아 구원 같은 노트북을 꺼내들고 멍하니 넷플릭스를 틀었다.
나는 부스럭거리는 봉투에서 꺼낸 햄버거를 먹으면서 브리저튼을 보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햄버거를 씹으며 화면 안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다가 순간 주인공의 얼굴이 보티첼리의 그림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코와 곡선으로 내려오는 입술, 눈에 어린 꿈 같은 것들이 오래 맴돌았고
그때부터 나는 화면 안에서 나를 여행하게 만든 것들을 기어코 찾아 헤맸다.
샤워실로 들어가 축축하고 눅눅한 몸을 뒤늦게 씻으면서는 <퀸스 갬빗> 의 욕조 안에서 붉은 머리칼과 당혹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프랑스어를 생각했고, 그 뒷모습의 절망을 자꾸 떠올렸다.
지도도 연락도 모두 어려워진 상황에서
몬테카를로의 이름 모를 누군가, 그리고 절망에 빠진 채로 내뱉는 프랑스어를 따라 읊조리는 것이 이상한 위로가 되었다.
이 다음엔 파리를 가기로 했잖아... 거기 가서 그 프랑스어를 똑같이 말해볼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밤늦게 침대에 누워 그제야 조금 울었다.
밖에서는 불꽃놀이가 총소리처럼 터져대고 있었고, 나는 지레 겁에 질려 프런트에 전화를 했다가
사실을 알고 조금 우습고 씁쓸한 마음으로 처음으로 Merci, 라고 말해보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에는 점심 때가 아주 지난 뒤에야 일어났고,
나는 2시가 넘어서야 카푸치노와 크로와상 하나, 밀푀유를 먹었다.
문질러도 개운해지지 않는 눈가를 달고 나는 백화점에서 모토롤라 핸드폰을 하나 사 유심을 끼웠고, 그대로 바다에 가서 길고 시원한 물에서 수영을 했다.
한 달 여행을 끝내고 네덜란드로 돌아와, 나는 그 핸드폰으로 R에게 잘 지냈냐는 연락을 보냈고,
R은 어김없이 만나자고 했다.
나의 그 팔자에도 없는 모토롤라 핸드폰이 R의 핸드폰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R과 깜짝 놀라 웃어대면서, 나는 몬테카를로의 번쩍이는 이름이 모토롤라로 옮겨가고, 이걸 어딜 가든 가지고 다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영화의 노릇노릇한 햇빛과 이국의 뾰족한 이파리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