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이상하게도 로마에서의 기억은 흐릿하다.
로마에 남은 것은 가죽 수첩에 적힌 글들뿐이다. 그마저도 로마가 아닌 피렌체에서 산 가죽 수첩이다.
그 수첩에는 긴 갈색 가죽 끈이 달려 있었는데, 나는 신발끈을 묶듯이 매번 그것을 매듭지었다.
여행 중에 나는 그 가죽 수첩을 정말 많이 열어 글을 썼다 ㅡ 어느 골목길 지하에 펼쳐진 화덕 앞에서도, 조토의 종탑을 코앞에 마주보고 있었던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도. 그러나 그 매번 나는 가죽 끈을 풀어내 수첩을 펼치고 음료가 나오면 다시 끈을 묶어 한쪽에 두었다. 그 수첩에 나는 글을 썼고, 스케치를 했다. 굵고 둥글게 굴려지는 볼펜으로 종탑을 스케치한 위에는 커피를 떨어뜨려 물들여서 갈색으로 색을 입히기도 했다.
로마,
나는 24시간 다이너 같이 얼룩지고 어둑한 바에 앉아 있다.
일 디에트로 - 나는 그곳의 이름을 헷갈리지 않고 선명하게 기억한다.
5일 동안이나 묵었던 로마의 호스텔은 마치 기억에서 사라진 듯하다. 그 도시에서 먹은 음식도, 거리의 구석구석도 떠올리는 데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일 디에트로만은 눈앞의 사진처럼 기억한다.
붉은 카운터와 검은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바닥, 조그만 문 너머로 로마의 따뜻한 노란빛은 입을 벌리고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에 팔다리가 늘어져 잡아당겨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침을 흘리며 주욱 웃는 열기 같은 것에.
그곳에서 나는 주황색의 태양 같은 차가운 음료를 주문했다. 알코올 없는 그것은 투명한 잔에 담겨 나왔고, 아름다운 바위 같은 얼음이 커다랗게 들어 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처럼 들어 있는 오렌지 조각을 휘저어 가라앉히고 나는 그것을 마신다.
마시면서 나는 '냉정과 열정 사이' 의 아오이를 생각한다. 조용한 눈빛으로 밤의 거실에 서서 이런 유리잔에, 이런 얼음에, 이런 음료를 마시고 있었던 그녀를. 이곳은 그녀가 있던 밀라노도 아니고, 환하고 뜨거운 낮이며, 그 음료는 이런 색이 아닌 아마 과일처럼 새빨간 색이었겠지만, 나는 밀라노가 아닌 로마의 어둑하고 침침한 바에서 그녀를 느끼고 있었다.
그날은 열 번의 모욕을 당한 날이었고, 내 생일이었다. 차창 너머로 이상하게 꽂히는 시선, 양쪽 눈을 찢는 두꺼운 손가락, 등 뒤에서 들리는 박수와 웃음소리, 귓속에 속삭여지는 니하오, 문을 열어주지 않는 버스, 다리를 구르며 날아오는 고함 소리
그 모든 것이 거리에 노란빛으로 늘어지고 있는 한낮을 지나, 나는 일 디에트로에 있다.
그리고 나는 오렌지 조각이 든 차가운 태양 같은 음료수를 마시면서 아오이를 느끼고 있었다. 거실에 서서 내려다보는 그 조용하고 무심한 눈길이 나를 보는 것처럼 느끼면서, 나는 천천히 심호흡 하며 생각했다. 그냥 수첩을 들고만 있고 싶다고. 어떤 것도 쓰지 않고, 어딘가 밖에 앉아서.
그 날의 기억은 흐릿하다.
한참을 기억을 더듬어 그날 내가 갔던 곳을 떠올려보면, 다른 것은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고 남은 것은 한 다리 위이다.
강을 가로지르는 가리발디 다리.
나는 전날 가보았던 그곳으로 몸을 질질 끌며 걸어가 그 위에 걸터앉아 수첩을 꺼냈다. 끈을 풀고 강을 타고 흐르는 바람을 맞으며 내려다보다가,
수첩에 적는다.
초저녁,
호스텔에 들어와 샤워를 했다.
자정이 넘어서 잠에 들었고,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눈이 소리없이 가득 내리고 있었다.
검고 단정한 돌로 쌓은 모퉁이에서, 나는 누군가와 마주보고 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 낯선 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아주 오래전에 알던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다지 가깝지도 않았으며, 어떠한 애틋함도 없는 이름.
낯선 사람은 눈이 아주 크고 예뻤는데, 나는 이유 없는 웃음처럼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좋아하고, 어쩌면 나도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에게 내가 무언가를 물었는데, 그 순간 그의 얼굴과 눈이 환해지며 반짝거리는 빛이 났다.
그리고 눈앞에 흐린 회색 빛이 드리워졌을 때,
나는 내가 잠에서 깨 호스텔 커튼으로 들어오는 어둑한 아침 빛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꿈에서 깨서 나는 생각했다 ㅡ 왜 이상한 것을 몰랐을까, 눈이 하얗게 펑펑 오고 있었는데
춥지도 않았는데.
서울
나는 집에 있다.
적당히 흐린 날씨이고, 나는 11시가 되어서야 느지막히 일어났다.
아이보리색 긴 치마를 입는다. 덩굴 모양의 무늬가 조각조각 그려진 긴 치마를 입으면 가는 걸음마다 치마가 흐르며 나를 남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냉장고에서 방울양배추가 아닌 파와 마늘을 꺼내고, 링귀니 면을 꺼내 양을 가늠한다. 링귀니는 삶아지는 데 10분이 걸린다. 기숙사에서는 물이 끓는 데 20분이 넘게 걸리곤 했다. 그래서 집앞 마트를 갔다오면 장 본 것들을 정리하고 냉장고에 넣기 전에 물을 올렸다. 냄비 안의 잠잠한 물을 두고 나는 옷을 갈아입고, 재료를 다듬었다.
이곳에서는 물이 끓는 데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조금씩 끓어오르는 물을 두고 음악을 튼다.
나는 도마를 꺼낸다. 집의 도마는 둥근 모양에 바깥쪽은 파란색이고 안쪽은 노란색이다.
눈을 뜨지 않으면 인생은 나를 지나쳐 가겠지
그러니 나를 깨워줘, 모든 게 끝나면
내가 좀 더 지혜로워지고 시간이 더 지나면
노래에서는,
가벼운 북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마 원래 그 노래에는 있지 않은 소리일 것이다.
나는 면을 삶으며 영어로 들어야 할 노래를 한국의 언어로 듣고 있다.
암스텔베인
눈앞에 병원 침대가 있다.
조금 탁한 흰색의 벽이 둘러싼 방이다. 나는 그 방에 서서 침대를 마주 보고 서 있다. 침대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다. 나를 보고 있는 그 사람은 얼굴이 보이지는 않는데, 그저 곧은 자세로 하리를 펴고 침대 위에 이불을 덮고 앉아 있다.
키스해줘, 라고 어떠한 예감도 없이 그 사람이 말한다.
나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진회색 텁텁한 이불이 있는 내 방 기숙사의 침대다. 천천히 잠에서 현실로 의식이 돌아오는 중에, 나는 생각했다. 키스를 해줄걸 그랬네
어디가 되었든 나는 여행을 다녀오면 반드시 아프다.
밀라노부터 런던까지의 긴 여행이 끝나고 네덜란드로 돌아오자 생리가 시작됐고, 그날은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뒤틀다가 진통제를 먹고 그대로 뜨거운 몸으로 잠이 들었다. 두세 시간이 지나 나는 묘하게 몽롱하고 가벼운 상태로 잠에서 깼다. 병원 침대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서서히 꿈 저편으로 옅어진 후, 나는 약이 잘 들었구나 하고 몸을 일으켰다. 8월 초의 저녁이었다. 조금 비척거리면서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챙겨 공용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방으로 돌아오자 시간은 9시가 되었는데도 밖은 여전히 초저녁 때처럼 흐리고 환했다. 열감이 지나간 것처럼 어지러운 가벼움을 느끼며, 나는 하늘색 바구니를 챙겨 부엌으로 가서 아주 많은 양의 파스타를 삶았고, 모두 먹었다.
다음날에는 R을 만났다.
우리는 학기가 모두 끝나 기이할 정도로 조용한 학교의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한 잔씩 샀다.
R이 무엇을 마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주문한 라떼는 검은색 필기체가 휘갈겨 써진 하늘색 플라스틱 컵에 담겨 나왔는데, 그것은 내가 학교에서 처음으로 사 마신 커피였다.
아침에 오면 항상 줄이 너무 길게 서 있었거든 하고 말하면서, 나는 가을학기가 다 지난 8월이 되어서야 처음 산 카페테리아의 커피가 조금 민망했다. 그 커피가 너무 완벽하게 이곳의 나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R은 만날 때마다 늘 들고 왔던 노란 뚜껑의 텀블러를 닫고 걸음을 옮기면서 그 차분한 음악 같은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집에 가져가, 기념으로
카페테리아에서 계단을 한층 올라가면 도서관이 나오고, 그 옆에는 넓은 공간이 하나 있다. 나는 커피 컵을, R은 텀블러를 하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곳에는 하얀 테이블과 하얀 의자가 여러 개 있었는데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 벽과 천장에는 주황색 푹신해 보이는 네모들이 칠해져 있었고, 건너편에는 낡고 푹푹해보이는 소파가 있었다.
그곳에 앉아, R과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막 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만난 가벼운 어색함으로 안부를 묻는 말을 할 때면 꼭 겉도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기다렸다. 이야기가 서서히 초점을 맞출 때까지 ㅡ 사랑과 무당벌레, 괴테와 불교에 대한 말들이 흘러나올 때까지. 그럼 우리는 시험 공부를 하다가도 몸을 기울여 끝없이 이야기했고, 밤거리를 40분 동안 걸으면서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R은 말했다. 자기는 사람들이 '나' 라는 것을 온몸에 하나의 끈적한 풀처럼 뒤집어쓰고 사는 것 같다고. 모든 사람들과 세상 사이에는 자신이라는 겹이 하나 존재하고, 그래서 타인을 볼 때는 절대로 그 겹을 뚫고 들어가서 그 사람에 닿을 수는 없다고. 사랑은 그 풀 안의 누군가가 느낄 고통을 이해하고 아끼는 거라고 생각해, R은 말했다.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사람들은 비눗방울 같은 자신의 세계 안에 산다고 생각한다. 모두는 그렇게 자신의 비눗방울 안에서 커다랗고 투명한 공처럼 그것을 굴리며 살아가고, 그 방울은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서로의 비눗방울이 맞닿아 붙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난 뒤에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비눗방울이 그려졌고, R이 뒤집어쓰고 있는 풀을 상상했다.
그 뒤로도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도 있었으며, R이 일하고 있는 곳의 매니저가 너무 전화를 자주 한다는 이야기도, 어제는 따뜻했다가 갑자기 서늘해진 날씨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암스테르담 날씨 매니저가 있다면 좀 따져야 돼, 말하며 우리는 웃었다.
웃다가 R은 말했다. 나는 이게 좋아. 너랑은 무거운 이야기도 했다가 가벼운 농담 같은 이야기도 넘나들 수 있는 거. 나에게 관계를 표현하는 말 중에서 그보다 정확하고 아름다운 말은 없었다.
그 날은 마지막으로 R을 만난 날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R과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는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전날 꾸었던 병원 침대의 꿈을 말해주었고, R은 언젠가 자신이 뉴욕에 있을 때 꾸었던 아주 이상한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것은 완전한 암흑 속에서 나타난 흰 손에 대한 것이었다. R은 자신이 왠지 모를 외로움과 절박함, 사랑으로 그 손을 잡고 키스를 퍼부었다고 했다. 그러자 손은 사라지고 느닷없이 얼굴을 알 수 없는 한 여자가 나타났고, R은 꿈에서 깨어났다. R은 말했다.
그때 동네 성당에 손 한쪽이 없는 성인의 조각상이 있었는데, 그 꿈을 꾸고 찾아가보니까 보수를 한 건지 손이 생겨있더라고.
나는 완전히 빠져들어 그 꿈 이야기를 들었고, R에게 이 이야기를 글로 써도 되냐고 물었다. 물론이지, R은 대답하며 말했다. 쓰게 되면 영어로 번역해서 보내줘.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조용했는데, 문득 R이 조용하고 어쩐지 들뜬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려?
나는 R이 무슨 기계 소리를 듣는 줄 알았다. 천장의 배관에서 들리는 소리 같은 것. 뭐가? 묻자 R이 대답했다. The silence between us. (지금 우리 사이의 침묵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