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그토록 아지트를 좋아할까?
예전에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에게는 Y라는 친구가 있었다.
Y는 나의 소꿉친구이자, 단짝 친구였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서로를 찾았다. 생일이 되면 당연히 서로의 집으로 놀러갔고, 생일이 아니더라도 근사한 찻잔을 자주 꺼내들었다. 그 티 세트가 어른의 도자기가 아닌 어린애의 플라스틱이라도 상관없었다. 흰 주전자와 찻잔에는 딱 알맞은 무늬와 색깔의 나뭇잎 덩굴과 꽃이 그려져 있었고, 거기 따라 마시는 녹차우유는 충분히 예쁘고 근사했다.
Y는 아파트 뒤편의 나무들 틈으로 걸어들어가며 긴 옷자락을 팔랑이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애의 이야기 속에 있는 모든 비밀과 환상을 믿었고, 그곳은 세상에 없는 곳이 되었다. 그 나무들 사이에서 Y가 나는 신화 속의 여신들처럼 평생 결혼하지 않을 거야, 말하면 나는 믿었고 그곳은 이미 신화 속에 나오는 숲이었다.
그러나 나 혼자 그 찻잔을 꺼내고, 우유에 녹차를 풀어 마신다면 그것은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나의 얼굴과 로고 박힌 후드티로는 나는 그런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아지트를 만들 수 없었다.
무언가가 필요했다. 어릴 때에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와 누군가의 아름답고 난처한 눈매를 보면서 느꼈던 것, 누군가의 뼈마디 선명한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면서 느꼈던 것, 누군가의 흑백 사진 속 겨울같이 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느꼈던 것
대개 그런 사람들이 누구도 모르는 아지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소파 뒤쪽에 숨어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크고 푹신한 소파의 구석자리로 내 손을 잡고 이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눈과 공기에 비밀과 안식처가 있었다.
나는 그런 것들을 욕망하고 필요로 했다. 흰 찻잔 속에 담긴 우유가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그 아름다운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필요했다. 이상한 사람이 필요했고, '넌 참 이상한 아이구나' 라는 목소리가 필요했다. 어린 아이였던 나는 그 말을 듣기보다는, 그 말을 하는 것을 나의 목소리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Y에게 자주 말했다. 넌 참 이상한 아이구나. 네가 좋아.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나는 하이틴 영화에 나올 것 같은 A를 만났다.
그 애는 밝고 환한 눈과 진한 눈썹을 가지고 있었고, 큰 키와 긴 팔로는 못 보는 사람 없이 인사를 하고 다녔다. A와 나는 조별과제를 하다가 친해져 강의 시간에 자주 옆자리에 앉았는데, 어느 쉬는 시간에는 수다를 떨다가 A가 말했다. 도라에몽 알아? 알지, 나는 말했고 A는 노트를 밀면서 그려보라고 말했다.
A의 눈은 웃고 있었고, 내가 도라에몽을 다 그릴 때 즈음엔 A는 소리내서 웃어젖히고 있었다. 내가 봐도 내 도라에몽은 기괴해서 나 이렇게 따라 그리는 거 말고는 그래도 이것보단 나은데 ㅡ 그런 변명을 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노트의 사진을 찍고 나서 A는 내가 그린 도라에몽 얼굴에 흉터와 손에 낫을 그렸다.
ㅡ공포영화에 써도 되겠다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 흉악해서 나도 정신없이 웃고 말았다.
A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어쩐지 지난번에 자기가 추천해준 노래들 가운데 내가 마음에 들어한 노래는 그 중 가장 이상한 노래였다고.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이상한 도라에몽을 그리는구나 - 유년기에 무슨 일이 있었니 하고 놀린다.
하이틴 시리즈에 나올 것 같은 A,
그 애와 나는 금세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너 진짜 이상하다,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A가 랩을 작사 작곡한다는 것과, 내가 시를 쓴다는 것을 알게 된 뒤였다.
나는 A가 전혀 하이틴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애와 나는 쉽게 이상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지금에 와서 그 이야기 전부가 기억이 나지 않아도 나는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ㅡ A는 내가 가장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친구인 동시에, 내 가장 내밀한 외로움에 대해 말했던 친구였다. 내가 A에게 말했던 것들은 내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말하는 단어와 다르지 않았다. 그 애에게 '좀 이상한 얘기인데' 하면 그 애는 하루 이틀이야? 라고 받아쳤고 나는 웃으면서 어쩐지 말싸움에서 이기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넌 진짜 이상하구나.
우리는 서로 가장 머뭇거릴 만한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그런 말을 자연스럽고 가볍게 던지고 놀았다.
우리는 어디든 한두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하며 보냈다. 센트럴의 바에서는 맥주를 마셨고, 학교 앞 잔디밭의 벤치에 앉아서는 치킨랩을 사다가 점심으로 먹었다.
그 날 벤치 주변에는 초록빛 풀이 가득했고, 유난히 많은 까마귀가 날아다녔다. 우리는 서로에게 보여줄 랩과 시를 찾고 있었다. 핸드폰에 메모해둔 가사를 찾다가 A는 까마귀에게 공격당한 적이 있다면서 이따금 몸을 웅크렸고, 나는 힘껏 웃어젖혔다.
ㅡ그냥 새잖아.
ㅡ쟤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네가 몰라서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그 애는 자신이 힌디어로 쓴 가사를 영어로 번역해주었다. A는 먼저 힌디어 가사를 읽고, 그 다음에 잠깐 고민하다가 그걸 영어로 바꾸어 말해줬는데, 나는 전혀 듣지 않던 랩에 몰입해서 들었고 힌디어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시랑 랩은 비슷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A는 영어로 번역해온 내 시를 읽고 열기 어린 목소리로 흥미로워하며 이야기하다가 말했다.
네덜란드에 올 때 나는 시집 하나를 챙겨 왔다.
무슨 생각으로 골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릴케의 시집이었다.
그 시집은 독특한 구성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쪽 페이지에는 독일어로 시가 적혀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한국어가 적혀 있었다.
14시간의 비행기 안에서 한 번 펼쳐보고 왠지 잘 읽지 않았던 그 시집을 다시 꺼낸 것은 이상하게도 R과 만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R을 만났고,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길 옆에는 자전거들이 끝없이 줄지어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잔디밭이, 아래에서는 강이 불투명하게 빛나며 흐르고 있었다.
R과 있으면 이상하게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관행이라도 된 것처럼 만나면 꼭 밝은 저녁 운하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먹는 아이스크림, 바람이 심해질 때 즈음 들어간 - 주황색 투명한 촛불을 켠 레스토랑에 앉아서 너무 하얀 테이블보를 보며 터지는 웃음 같은 것들, 언젠가 갔던 잔디밭 화안한 꽃나무 아래 눕듯이 기대 앉아 물 위로 흩어지는 꽃잎을 보는 일들이 그랬다.
그 날도 한참을 걸어 R과 한 공원에 가서 앉았다. 공원은 흐린 빛 아래 초록색으로 가득했다. 우리가 앉은 공원 벤치 위에는 커다란 나무가 건조한 파편 같은 잎을 가득 드리우고 있었는데, 늘 그렇듯이 변덕스럽게 내리기 시작한 비를 완전히 막아줄 만큼 큰 나무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오래 걷느라 조금 조용해진 목소리로 서로 가방에 든 것들을 부스럭거리며 꺼내면서 웃었다. 그러다가 릴케의 그 시집을 꺼내게 됐는데, R이 오래되어 누렇게 변한 종잇장을 넘기며 자신은 독일어는 발음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독일어의 견고한 발음을 오래전부터 좋아했다.
그래서 나와 R은 나무 아래서 그 시집 중의 '사랑의 노래(Liebes Lied)' 라는 시를 읽었다. 먼저 R이 독일어를 읽었고, 그 다음에 내가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해 읽었다.
비가 오는 나무 아래, 우리는 이상하게 긴 시간 동안 조용히 그 하나의 시를 읽어나갔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를, R이 알아들을 수 없었을 한국어를 들으며. Oh sweet song, 이라는 구절로 시가 끝이 난 뒤 R은 나에게 한국어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달라고 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그 날은 많은 것들이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만, 늘 흐린 나무 바깥에서 언제부터 비가 오고 멎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뒤로도 두어 시간이 되어서야 어스름한 공원에서 빠져나왔다.
이따금 나무들 사이로는 초록색 깃털을 가진 작은 새들이 날아다녔다. 암스테르담에 정말 많은 새들이었다. 눈을 스치는 초록색 깃털을 서로 가리켜가며 R은 나에게 Uccello 를 알려주고, 나는 R에게 새 를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