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의 호스텔을 기억한다.
밤 9시만 되어도 암흑처럼 새까매지던 사방과 뒤에서 문이 쿵 닫힐 때의 완연한 공포를.
세 개의 문을 열고 네 번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 밤하늘 아래 공사판처럼 허름한 복도가 나왔다. 그 복도는 사각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오른쪽에 갈색 문이 하나 있었다. 생뚱맞게 '잠금' 이라는 글씨와 함께 삼성이라고 적혀 있는 도어락을 보면 안도감에 덜덜 떨면서 비밀번호를 누른다.
문이 열리면 좁은 틈새로 부는 바람처럼 재빨리 안으로 밀려들어가 밝고 하얀 형광등을 모조리 켠다. 넓은 거실에 존재하는 냉장고며 식탁이 환하게 눈에 들어오면 나는 비로소 마음을 다 내려놓는다.
해가 빨리 졌던 4월의 부다페스트,
현관이며 복도에 불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숙소에 무사히 들어오기 위해서 나는 때로 해가 질 무렵부터 슬금슬금 공포를 느꼈고 집에 들어오기 위한 규칙들을 복기했다.
ㅡ 첫 문인 거대한 철문이 등 뒤에서 완전히 닫히기 전 핸드폰 플래시를 켤 것
ㅡ 그 다음에는 계단을 차례로 올라가 노란색 열쇠로 복도의 문을 열 것
ㅡ 복도 위쪽 벽에 문득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면 그것은 플래시에 비친 내 그림자이니 숨이 멎도록 놀라지 않을 것
같은 규칙들
그러나 나는 매일 좀처럼 숨도 못 쉬고 계단을 뛰어오르고 문들을 열었는데, 어느 날 하루는 늦은 저녁을 먹고 들어온 날이 있었다. 보통 나는 해가 지고 거리가 검푸른 색으로 물들 때쯤 숙소로 향했지만, 그 날은 저녁이 아주 늦어졌고 아무 데나 들어가서 먹은 굴라쉬가 예상을 한참 벗어나게 맛있었다. 야외 좌석 ㅡ 빨간색과 하얀색 체크무늬가 그려진 테이블보 위에 냄비 같은 굴라쉬와 꽃향이 나는 음료수를 나는 천천히 먹었고, 그러는 동안 해는 완전히 져서 거리는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등 뒤에서 철문이 큰 소리를 내며 쿵 닫혔다. 사방이 암흑으로 새까매서 눈이 적응될 때까지는 계단도 잘 보이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둠과 저 멀리 등대만큼 먼 건너편 건물의 희미한 가로등 하나뿐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참으며 핸드폰 플래시를 들고 계단을 뛰듯이 걸어 올라갔다. 나선형 계단의 난간은 차가운 철로 되어 있었고, 나는 아래를 바라볼 때마다 자꾸 공포 영화에 나오는 저택들이 생각이 났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갈 때, 무언가가 내 발밑을 슥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숨도 못 쉬고 번개처럼 굳은 채로 플래시를 든 손을 움직였는데, 저 아래 계단으로 달리는 그림자가 흰 불빛 아래 보였다. 검은 고양이였다.
그날 나는 비틀거리듯이 환한 거실을 지나 방에 들어와 침대에 기절하듯이 누워버렸다. 그리고 뒤늦게 생각했다. 걔도 어지간히 놀랐겠다고. 어쩌면 유령 같은 건 그 애 입장에서 나였을지도 모른다.
이곳에 온 첫 날, 나는 캐리어를 방에다 놓고 화장실을 가려고 했는데 문이 잘 잠기지 않았다. 마침 누군가가 건너편 방에서 걸어나오길래 문 잠그는 법을 물었다. 바짝 깎은 머리에 큰 눈의 그는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서
문 - 딸깍 - 알아? 하는 식으로 서로 이야기했다. 아무리 해도 문이 잠기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는 방법을 설명하더니, 선뜻 화장실로 들어가 문이 잠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그가 다시 문을 열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 바깥에 있던 나는 안에서 들려오는 당혹스러운 덜컹거림과 웃음소리에 웃음이 터져 버렸다. 안에 있는 그도 황당해하며 웃고 있었다.
Call my friends, my friends -
웃음소리와 덜걱거리는 소리가 비슷해져 갈 때 즈음 그는 짧은 문장으로 그렇게 말했는데, 내 쪽에서도 아니 네 친구들이 어딨는데, 어떻게 불러? 어디 있는지 말해줘, 불러줄게, 하는 대화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다른 누군가가 복도를 지나갔고, 나는 이유 모를 확신에 그를 붙들고 설명했다. 다행히 그는 그의 '친구' 가 맞았고, 다같이 양쪽에서 당기고 돌리니 원리는 몰라도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 친절하느라 갇혀 있었던 그도 마침내 탈출할 수 있었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그들과 나는 화장실 앞에 서서 웃어젖혔고, 서로 이름을 나누었다 ㅡ 두 번째 규칙은 화장실 문은 신중히 잠글 것
그래서 부다페스트의 호스텔에서 우리는 샤워를 할 때 음악을 틀어두었다.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화장실에서는 샤워기 소리와 함께, 마치 고개를 흔들며 노래를 하는 듯한 남자 가수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흘러나왔다. 어느 나라의 언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가끔 기숙사 공용 샤워실에서 들리던 빠른 남미의 음악을 떠올렸다.
화장실이 비고 조용해지면 나는 수건과 옷을 챙겨가 샤워를 했다. 음악을 골라 틀고 핸드폰 줄을 옷걸이에 걸어두면, 거꾸로 매달린 핸드폰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노크를 하거나 문을 열지 않도록 나도 소리를 크게 해두었는데, 물소리에 묻히지 않을 정도로 크게 음악을 틀고 샤워를 하는 것은 부다페스트에서가 처음이었다.
가끔은 한국어 노래를 틀었지만 나는 보사노바를 가장 많이 들었다. <Getz/Gilberto> 는 클림트의 그림 같은 주황색 커버의 앨범인데, 첫 번째로 흘러나오는 The girl from Ipanema 를 들으면 샤워기의 뜨거운 물처럼 천천히 마음이 가라앉고 몸이 느긋해졌다. 그럼 나는 금세 그 호스텔이 좋아졌다. 문이 잘 안 잠기니 사용 중이라는 깃발을 꽂아놓듯 음악을 크게 틀고 샤워를 할 수 있는 것도, 한 방에 10개의 침대가 빼곡히 있는 대부분의 호스텔이 아니라 독방에 거실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곳인 것도.
물론 샤워실에는 언제 두고 간 것인지 모를 플라스틱 샴푸통이며 면도 크림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런 것에서 나는 집 앞 마트를 떠올리곤 했다. 기숙사에서 나오면 파란색 다리 아래 강이 있다. 아름다운 벽돌과 하얀색 네모의 다리 아래 흐르는 암스테르담 시내의 운하와는 달리 암스텔베인에는 그저 초록색 나무, 파란색 다리와 강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노란색 마트가 하나 보이는데, 검은색 테두리에 커다란 노란색 알파벳으로 JUMBO 라고 쓰여 있다.
그곳에 들어가 납작복숭아를 담거나, 링귀니 면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가늠하며 이탈리안 코너를 돌아다니거나, 알이 큰 방울양배추를 발견하면 기분이 환해질 때에, 그 매번 나는 JUMBO 라는 글씨를 보란 듯이 윰보라고 혼자 노래하듯 속으로 말하곤 했다. 네덜란드어로는 그렇게 발음한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부터는 줄곧 그랬고, 이제는 그 노랗던 알파벳을 생각하면 마음이 온통 술렁거린다. 네덜란드에서는 우박이 내리다가도 5분 뒤면 햇빛이 환하게 쏟아져내리고는 했는데, 그럴 때면 얼룩진 나무들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윰보를 생각하면 그런 마음이 된다.
처음 기숙사에 들어온 날도 나는 윰보에 갔다. 물론 방에는 가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먹을 것과 씻을 것이 필요했다. 무인도에 떨어진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환하게 불을 밝힌 저녁의 윰보에서 이것저것을 담았다. 그 날은 달걀 몇 개와 커다란 치즈, 토마토를 사다가 먹었고, 보라색 바디워시와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는 샴푸, 흰색 통의 컨디셔너를 샀다. 늦은 밤에 처음 샤워실에 들어가 물을 틀었을 때 나는 빳빳하고 딱딱한 물에 놀랐고, 플라스틱 통에서 젤리나 괴물처럼 나오는 바디워시에 멍해졌다.
나중에 샴푸는 다른 것을 사기 시작했다. 흰색 컨디셔너를 쓰면서는 나는 프랑지파니 향을 좋아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뻣뻣한 물 때문에 결국 컨디셔너도 더 부드러운 다른 것을 찾았다. 하지만 나는 그 보라색 젤리 괴물 같은 바디워시는 꽤 오래 썼다. 미끌거리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라벤더는 안정에 도움이 된댔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부다페스트를 떠난 지는 오래되었고, 이제 이곳에는 그 보라색 괴물 같은 바디워시는 없다.
그러나 한국에도 보라색 비누는 있고 (사실 향은 윰보의 바디워시보다도 좋다),
그 때 듣던 음악들은 재생목록에 남아 있다.
방울 양배추는 귀하지만 양배추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처럼.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첫날, 나는 저녁을 먹으러 한 식당에 갔었다.
그곳에는 붉은 색으로 테두리를 칠한 작은 접시들이 울퉁불퉁한 벽에 걸려 있었고, 이름 모를 마른 식물들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나는 창가의 복도에 있는 애매한 위치의 작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왼쪽 옆에는 피아노가 하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두리번거릴 때 누군가가 피아노 앞에 앉았고, 곧 어떤 장르인지도 모를 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그 음악 소리에 맞춰서 식당 안에 붉은 황금처럼 빛을 발하는 촛불의 열기가 천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 날 나는 그곳에서 양배추 요리를 먹었다.
새빨간 수프 같은 국물 위로 둥글게 만 양배추가 있었고, 한입을 먹으면 뜨거운 국물과 다진 고기, 무르고 따뜻한 양배추가 지친 몸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