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 있을 때, 나는 종종 춤을 췄다.
애인과 전화를 하다가 헤어지기로 한 날에도 그랬다.
갑작스럽지는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애인과 헤어지는 것이 처음이었다.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저녁 8시는 한국의 새벽 3시였고, 비가 오고 있어 나는 대뜸 우산을 들고 나가서 걸었다. 첫 이별이 네덜란드라니, 하고 기막혀하면서 열이 나는 것 같은 몸을 이끌며 걷다가 처음 가보는 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곳에는 젖은 초록빛 나무로 둘러싸인 들판 같은 곳이 있었는데, 흐릿한 빛이 밝게 한가운데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내리고 그 가운데로 걸어갔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비는 멎어 있었고 나는 거기서 춤을 추었다. 원을 그리며 도는 동안 내 시야에는 어두운 그늘에 잠긴 나무와 풀밭의 초록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흐릿한 하늘의 빛이 아주 밝은 환상 같았다. 얼굴과 눈이 다 네덜란드의 물기 어린 공기로 젖었을 때쯤 나는 제자리에 서서 생생하게 차는 숨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나무의 그늘에 가려진 축축하고 어두운 풀밭으로 걸어나갔다. 그 즈음 발목까지 오는 내 까만 운동화에는 젖은 초록빛 풀 조각들이 잔뜩 묻어 있었고, 조금씩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내가 숨을 고르는 동안 야행성인 친구 H에게서 연락이 왔고, 그 날은 H와 이야기를 조금 하고는 저녁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춤을 추었던 날은 대개 그런 날이었다 ㅡ 어떠한 파편이 느껴지는 날들
첫 파티에서의 춤도 그랬다. 비가 내리고 추운 네덜란드의 2월, 나는 기숙사 휴게실에서 열린 파티에 까만 초커와 까만 니트를 입고 갔었다. 절망적일 정도로 적당한 자리였다. 거기 있던 모든 이들의 눈빛에서 이상한 불안정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방인들이 영어로 모인 자리. 과자와 맥주를 두고 카드 게임을 하다가, 이름과 나라를 물으면 궁금한 것들이 사라져버리는 자리였다. 그곳에서 칸예 웨스트니 테일러 스위프트니 하는 화려하고 선명한 이름들이 오가는 수다를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디선가 본 듯한 그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고, 그도 여의치 않을 때는 눈을 크게 뜨거나 웃는 것뿐이었다.
그러다가 불이 모두 꺼지고 스피커에서 쿵쿵 거리는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일어나 춤을 추면서 맥주나 보드카를 마시기 시작했고, 그 어지러운 곳에서 너무나 맨정신이었던 나는 다른 이들이 이끄는 대로 난생처음 춤을 추었다. 다른 사람들과 림보를 하듯이 허리를 꺾으며 지나가기도 하고, 몸을 자유롭게 푸는 법을 배웠다. 누군가가 ㅡ너도 춰! 하는 소리를 가끔 크고 활기차게 내질렀다. 춤을 추는 동안에는 음악이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멀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곳에서 보낸 설을 기억한다.
내가 보낸 것 중 가장 기묘한 설날이었다.
기숙사에는 이탈리아에서 온 친구가 하나, 스페인의 친구가 하나, 중국이 다섯, 그리스가 하나, 코소보가 하나, 인도가 하나, 일본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나까지 한국이 하나. 나는 이 지도 같은 나라들과 Uilenstede 기숙사의 44번 빌딩에서 모여 살았는데, 이곳에서도 나는 이방인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아예 네덜란드에 사는 친구들이었다. 나만이 짧고 가벼운 시간을 들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들이 함께 보낸 밤과 담배, 와인과 애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그 펼쳐지는 시간이 아주 길어보여서, 나는 반쪽짜리도 아닌 꼭 하루살이의 시간을 들고 온 기분이었다.
파란색 페인트로 칠해진 부엌에는 내 방에 할당된 전용 찬장이 있었다. 그 정사각형의 네모에는 흰 분필로 누군가의 이름이 남겨져 있었고, 그 안은 청소되지 않아 더럽고 얼룩져 있었다. 중국에서 온 데니가 한쪽에서 닭을 손질하는 동안, 겨울의 어두운 부엌에서 나는 그 안을 모두 청소했지만 그 찬장을 쓸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정사각형의 새까만 네모 안에 쓰여진 이름을 나는 지우지 않았다. 부엌에 갈 때마다 나는 반년 뒤 떠날 나에 대한 예언을 보듯이 그 이름을 한번씩 바라보곤 했다.
데니는 두꺼운 안경을 쓴 삐죽한 친구였는데, 어느 날 기숙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설에 함께 만두를 빚을 건데 오겠냐고.
그때 나에게는 그 말이 아주 기묘하게 들렸다. 네덜란드의 파란 부엌, 중국 친구들이 설을 말한다. 그때는 2월이었고, 네덜란드에 온 지 3주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내가 요리에 대해서 하나도 모를 때였다. 데니가 말하는 만두는, 기숙사에 들어온 첫날 생면을 뽑아 눅진하고 질척한 생토마토 파스타를 해준 이탈리아의 조만큼이나 기묘했다.
그래서 나는 설에 정말로 만두를 빚어 먹었다. 이탈리아어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또 다른 친구 시아와 데니, 셋이서. 가장 못생긴 만두는 내가 빚은 것이었고, 속에 넣은 새우에는 양념을 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싱거웠다. 중국 친구들과 무언가를 같이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섞여드는 암스테르담은 이상하게 저마다 걸맞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듯한 곳이었다. 유럽은 유럽끼리, 동양은 동양끼리, 미국은 미국끼리. 베트남 친구들이 까르르 즐겁게 팔짱을 끼고 점점 그 수를 불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저는요 나는 유럽인도 미국인도 몰려다니고 싶지 않아하는 동양인인데요 그럼 저는요?
기숙사에서는 주로 혼자 시간을 보냈다.
조가 부엌을 쓰고 난 다음에는 싱크대 구멍이 자주 막혔고 인도의 젠이 부엌을 쓰고 난 다음에는 냄새로 알 수가 있었다. 그리스의 크리스탈은 항상 대여섯 명이나 되는 친구들로 부엌을 꽉 채웠고, 데니는 영어를 잘 할 줄 몰라 좀처럼 대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스페인의 바셋과 코소보의 딜런은 담배와 커피만 주구장창 할 뿐 밥은 대체 언제 먹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민한 거미처럼 움직였다. 한밤중, 내가 책을 들고 공용 거실로 향할 때 복도의 센서등이 켜지는 그 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줄을 타고 올라가던 작은 거미처럼. 나는 부엌에 아무도 없는 시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시간에 나는 연한 파란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하늘색 싸구려 도마, 소금, 후추 같은 것들을 넣고 슥슥 슬리퍼 소리를 내며 부엌으로 향했다. 어깨로 힘껏 밀어야만 열리는 무겁고 투명한 부엌의 문을 열고 들어가 등 뒤에서 문이 스르르 닫히고 나면 그제야 웃음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곳에서 나는 요리를 했다.
파란색으로 칠해진 부엌, 나는 멍하니 창밖을 보면서 휘어질 대로 휘어진 가벼운 플라스틱 도마를 꺼내고, 그 위에다 방울양배추를 자른다. 지금과는 다르게 길고 구불거렸던 머리카락은 틀어올리고 까만 손잡이의 칼로 칼질을 해나가다 보면, 나는 내가 조용한 공기가 되어 이곳에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창밖의 흰 저녁에, 사물들이 보일 정도만큼의 빛에.
방울양배추를 다 자르고 난 뒤에는 손을 씻고 꼭 이어폰을 꽂았는데, 줄이어폰이 아닌 에어팟은 내게 요리를 할 때 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핸드폰을 거실의 소파에 던져두고 돌아와 다시 탁자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귀에서는 프랑스어 노래가 재생됐다.
그럼 내 발은 아주 가벼워져 그 파란 부엌을 거니는 동안 춤을 추는 발걸음이 되었다.
낯선 청록색 물소리나 흑백 영화의 속눈썹 같은 그 노래는 아주 오래전 보았던 영화의 삽입곡이었는데,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면서 팬에 버터를 녹였다. 귀에서는 프랑스어가 들리고, 눈앞에서는 버터가 부글거리며 녹아내리면 부엌이 온통 그 냄새로 흐르는 순간이 있었다. 주걱 같은 것으로 버터를 눌러 빙글 돌리다가 잘라둔 방울 양배추를 거기에 볶는 동안, 나는 창밖의 흐릿한 저녁을 바라보았다.
암스테르담은 해가 늦게 졌다.
유월에는 9시가 되어도 아직 5시라는 듯이 거짓말처럼 밝았고, 밤이 어두워지는 것은 보통 11시가 가까워서였다. 바깥이 그렇게 어두워지면 창밖의 풀밭에서는 주황빛 깃발을 잔뜩 내건 네덜란드의 대학생들이 몸통 같은 장작을 넣고 모닥불을 피워냈다. 드럼통 같은 낡은 금속 안에서 불과 연기, 그림자가 높이 피어 올랐다. 그런 날에는 가끔 밖에서 펑 하고 모닥불이 터지는 큰 소리가 났고, 뒤이어 낯선 목소리들이 웃어젖히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렸다.
여름에 저녁으로 가장 많이 해먹었던 것은 파스타였다. 버터에 방울양배추를 볶고 거기에 나비 모양 파르팔레 파스타를 같이 넣는다.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올리브 오일을 두어 바퀴 두르면 심심하고 담백한 이상한 파스타가 된다. 나는 지나치게 희고 넓은 그릇에다가 파스타를 담아다가 방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공포 영화를 틀어두고 먹었다.
나에게 공포 영화는 생각없이 보는 가벼운 예능 같은 것 ㅡ 생각을 과격하게 없애주는 어떠한 것이다. 잔인한 장면들이나 무서운 것을 보면 깨끗하고 무의식적으로 정신이 집중된다. 공포와 강렬함에서 오는 묘한 해방감을 느끼다 보면 이상하게 몸을 씻고 나온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다 보면 그릇이 비워진다.
설거지를 마치고 깜깜해진 부엌에 서서 마른 수건으로 칼이며 도마를 닦아내고 있으면 무언가가 차분하게 채워지는 기분이 든다. 그냥 밥을 먹는 것으로는 안 된다. 야채 가득 든 샌드위치나 포케 같은 것을 사와서 먹는다고 해도 그러한 감각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칼질에서부터 마른 수건으로 이어지는, 어두워진 창밖에 켜지는 불빛들, 연한 하늘색 바구니에 내 것을 담아 방으로 돌아와 정리하고 자리에 앉는 순간의 감각이 있다. 그때 나는 내 정신이 내 몸에, 몸이 내 방에 들어맞는 것을 느꼈고, 대개 그때 어지러운 모닥불의 그림자가 하늘로 솟아오르곤 했다. 그럼 나는 커튼을 닫고 방 안의 어두운 황금빛 등을 하나씩 켰다. 그러면 내 그림자가 부드럽고 두터운 커튼에 드리워졌고, 그럼 나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틀었다. 주로 새빨간 색의 ㅡ 사나운 과일 같은 그런 노래들이었다.
밤,
커튼에는 괴물 같이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귀에서 처절하고 사나운 노래가 나오면 나는 춤을 췄다.
팔을 움직여 내 팔꿈치와 팔뚝의 곡선을 보았고, 치켜든 머리의 윤곽을 보았다. 허리가 꺾이면 즐겁게 눈을 감았고, 가끔 확실히 방문이 잠겨 있는지 스치는 눈빛으로 확인하곤 했다.
그러다가 그 한 곡이 끝나면 나는 문득 방 한가운데에 서서 생각하곤 했다. 혼자가 된 감각을. 밖에서 높게 타오르고 있을 모닥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