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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맥스 Nov 04. 2021

시련 총량의 법칙

나의 인생 그래프를 그려보니


에너지 보존의 법칙


물리 시간에 배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상태가 바뀌어도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총량은 보존된다는 건 기억이 난다. 선생님께서 열에너지를 가르치실 때, 주전자에 물 끓이는 걸 예로 들어 설명하셨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총량'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인지, '시련 총량의 법칙'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이해가 되었던 건 , 아마도 내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제대로 배웠던가 보다. 평생 받아야 하는 시련에도 총량이 있어서 지금이 괴로우면 말년엔 편하리라 하는 희망적 사고 말이다.


벌써 6년 전인가 '미술심리상담사' 자격증 공부를 한 적이 있다. 경기도로 이사 간 첫 해, 가까운 곳에 여성회관이 있는 걸 알고 가장 마음이 가는 강의를 신청했었더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사 선생님이 종교적인 색채도 짙고 장삿속도 있어 보였지만, 그 당시에는 공부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신나고 즐겁게 다녔었다. 그 해는 우리 가족이 경상도에서 경기도로 이사 간 첫 해여서  가족들 모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중이었고, 그중에 가장 염려되는 중학생 큰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같은 반 20여 명 정도의 엄마들 모두 수업을 듣는 가장 큰 동기가  취업보다는 자녀들의 심리를 읽는 데 있었던 거 같다. 한 학기 강의니까 한 석 달 정도 수업 듣고 시험 보고 해서, 미술심리상담사 3급 자격증을 땄다.


전 주에 상황이나 주제를 주시면 거기에 맞춰  교육생들 자신이나 가족들이 그림을 그려온다.  예를 들면 어항 속에 물고기 가족을 그려본다던지, 살고 싶은 집을 그려본다던지, 현재 가족과 원가족을 그려본다 등이 있겠다. 그럼 그 주에 숙제해 온 걸 보시고 설명해 주시는 쪽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놀라운 점은 숙제로 해 온 그림의 설명을 듣다 보면 꼭 우는 사람이 한 두 명 나온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문제로 울기도 하고,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울기도 하고, 남의 일이지만 공감이 가서 우는 교육생도 있었다.


숙제 예 1 :  당시 초2 둘째 아이가 그린 물고기 가족 그림


숙제 예 2 :  당시 내가 그린 원가족 그림


숙제 예 3 :  당시 내가 숙제로 그린 그림인데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 재혼, 가족의 죽음, 학대 등으로 상처 받은 기억에 울다가, 선생님의 말씀에  위로받고 가는 교육생들이 참 많았다. 결혼 전 나의 삶은 비교적 평탄했기에 그들의 경험이 생소하게 느껴졌었지만, 그들의 눈물은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고 또 같이 울기도 했다. 과거 그들의 삶이 녹록지 않았음에 진심으로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기길 바랬었다.  


'아. 나는 참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구나.'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딱히 걱정스러울 것도 딱히 힘든 것도 없었던 나의 어린 시절 기억에 새삼 부모님께 감사했더랬다. 집에 와서 바로 친정 엄마한테 전화를 드린 기억이 있다.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땐 아마도 시련 총량의 법칙을 몰랐었던가 보다. 나보다 남을 응원했다니 말이다. 그 당시에는 나의 안온했던 인생이, 지금까지 감사했던 평온한 삶이 그 이후 어떻게 바뀔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인생 그래프


그 이후의 한 수업 시간에는  '인생 그래프'라고 자신의 인생을 그래프로 표현해 보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x축이 나이, 시간이고, y축이 인생의 기쁨, 슬픔을 수치화해서 좌표에 점을 찍고 , 그 점을 곡선이나 직선으로 쭉 연결해서 그래프를 그리는 것이었다.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주인공이 현재 감방에 있는 상황을 나타내는데, 종이의 마이너스 좌표를 지나고 책상을 지나고 바닥도 지나고 아래로 아래로 그렸던 그 그래프 말이다.


미술 수업 당시 내가 그린 인생 그래프 : 95세까지?


언제나 플러스 인 줄만 알았지만, 시기 별로 나이별로 기억을 되살리니,  내  인생에도 힘든 시간이 나왔다. 나를 이뻐해 주시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시기는 마이너스 2고, 직업 군인이던 아빠의 직업 때문에 전학을 자주 다녔었는데, 그 시기는 그래도 0으로 나타냈다. 제 나이에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하는 무난한 삶이었기에 내 그래프는 쭉 플러스였다고 생각했는데, 취업 후 직장 생활이 힘들었던가보다. 마이너스 5나 되네.  결혼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나 보다. 플러스지만 점이 내려가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나의 시련의 시작은 둘째 아이가 아픈 것이었다. 수업을 듣는 그 시기는 그래도 가장 힘든 마이너스 10 상황은 벗어나, 내가 나를 위해 수업도 들을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둘째 아이는 6살 무렵 고관절에 문제가 있어서 2년 정도는 목발을 짚으며 뛰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고, 그 뒤로도 2년은 병원에 다니면서 계속 고관절 연골이 잘 재생되는지 체크해야 했다. 내가 수업을 듣던 그 시기는 가장 힘든 2년 정도의 시간은 지난 시기였고, 아이는 더 이상 목발을 짚지 않아도 되고 높은 데서 뛰거나 무리한 운동만 아니면 체육 활동도 할 수 있는 아주 감사한 시기였다.  그 당시 그래프로 표현하기를 마이너스 10을 지나 플러스 5까지 올라와 있고 앞으로의 그래프는 쭉 플러스 10에 있는 낙관적인 상황이었다.


먼 훗날 내 인생 끝자락에서 보면, 그래프 상의 넓이를 합쳐 플러스 쪽이 마이너스보다 많으면 행복이 많고 시련이 적었다는 뜻일까? 이때만 해도 행복 쪽이 우세했다.  여전히 조심해야 하지만 이제  아이 걱정 좀 그만 하고 '나만의 시간을 보내자'는 기쁜 마음으로 여기저기 공부하러 다녔었다. 미술심리지도사, 학습코칭 지도사 자격증도 따고 도예도 배우러 다니고 도서관에서 하는 인문학 강의도 들으러 다녔었다.


시련의 시작

 
다음 해 난데없이 시어머니께서 방광암 진단을 받으셨다.  우리 집 가까운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시고 항암 치료를 3개월 받으셨다. 힘든 항암 치료로도 안 되어서 나중에 인공방광 수술까지 받으셔야 했다. 물론 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키워주신 분이시니 돌봐드리는 게 맞지만, 정말 많이 힘들었다.  내가 다 했다는 거 절대 아니고,  시누가  많이 고생하고 묵묵히 돌봐드렸다. 입원 기간에는 내가 매번 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누가 주로 있고, 밤에는 남편도 있었다.  그 중간중간 보호자 음식을 싸들고 나르는 일이 나의 주 임무였지만, 항암 치료는 달랐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항암 주사를 맞으러 부산에서 올라오실 순 없는 일이었고, 우리 집과 시누 집에서 계시면서 주사를 맞으셨다. 그래프를 다시 그리라 하면 그 기간은 마이너스 10을 넘어 20, 30은 되었을 것이다.


시어머니 수술 후 경과를 지켜보는 사이 이번엔 친정엄마가 방광암 진단을 받으셨다. 시어머니보다는 일찍 발견하셔서 제거 수술만 하시고, 항암까지 하시진 않았다. 같은 병원 같은 교수에게 진료받고 수술받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항암 주사는 아니지만 치료를 위한 다른 주사를 3개월 맞으셔야 했다. 이걸 행이라고 해야 하나... 친정어머니의 일을 아시고서 시어머니께서는 일절 나에게 돌봄을 시키지 않으셨다. 친정엄마나 신경 쓰라고 하시면서 시어머니의 병원 검진은 오로지 시누 몫이 되었다...


마이너스는 계속 이어지는데..


그렇게 양가 어머니의 돌봄에 내 에너지가 쓰이는 사이, 종종 큰아이 학교에 호출되는 일이 발생했는데, 학교 선생님과의 마찰이 문제였다. 내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사춘기 아이의 행동으로 학교 선생님께 사과를 드려야 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고, 결국엔 소아정신과를 찾아야 했다. 시어머니는 거실에서 tv를 하루 종일 틀고 계시고(어머니도 항암 치료 중이시라 힘든 시기였고), 중 2 큰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있고(죽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우울한 시기였고), 나는 부엌 식탁에서 암담한 시간을 보냈다(나도 우울증이지 않았을까?).

상담 치료도 하고 우울증 약도 먹지만 아이는 안정되지 않았고, 1년 후 남편은 경기도를 떠나 예전의 직장으로 다시 내려가게 되었다. 아이는 같이 내려가기를 원했다. 이곳에서 행복한 기억이 없었던 걸까? 우리 가족은 4년 간의 생활을 접고 원래 살던 고장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와 때를 맞춰 친정엄마는 침샘암 진단을 받으셨고, 혀의 뿌리 부분을 절제하고 종아리 살을 떼어내어 이식을 하는 큰 수술을 받으셨다. 방광암 때는 초기였기 때문에, 그리고 시어머니의 경험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담담할 수 있었는데,  이때의 나의 상태는 그래프에 표시할 수 없는 정도의 '절망'이었다. 엄마를 돌보는 아빠도 걱정되었고, 수술 후 상태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고, 전학 온 큰 아이는 여전히 학교를 안 가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시어머니의 수술과 항암 때의 나는 나 자신의 스트레스와 힘든 것만 보였고, 남편의 힘든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었다. 따뜻한 말을 해 줄 생각도 않고 내 상황만 늘어놓느라 징징거리고 남편을 원망했었다. 엄마의 큰 수술을 앞두고 눈물로 보낸던 그때, '아 남편은 정말 많이 외로웠겠다. 힘든 걸 표현도 못하고 집에 와서도 위로도 못 받고' 남편에게 미안해졌다.  


시련의 총량이 채워지려면 아직 멀었나


그래도 시간은 가고 친정 엄마는 회복되셨다. 그러나,  본인이 오고 싶어 다시 내려왔지만 큰 아이는 여전히 학교에 가지 않았고, 학교에서 다시 선생님과 마찰이 생겨 결국 자퇴를 했다. 물론 아이가 크게 잘못했지만, 학교는 아픈 아이를 품지 않았고 너무도 배타적이고 적대적이었다. 전혀 교정이나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았고 학교가 베푸는 최대의 호의가 퇴학 처리가 아닌 자퇴였다.  세금을 내는 사회의 일원인데 사회에서 내쳐졌다는 배신감에 나 또한 울분이 컸었다. 하지만 어쩌랴 아이의 잘못인 것을. 그 아이가 내 아이인 것을. 반년의 시간을  보낸 후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고서 찾아간 대학 병원에서 조울증 진단을 받았다.  맞지 않는 우울증 약을 2년 반이나 아이에게 먹였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아이에게 맞는 약을 찾았고 다행히 좋아하는 그림으로 대학도 갔다. 지금은 경기도의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다. 그때 그래프를 그렸다면 마이너스가 지구의 핵까지 도달했을 거다.   


시련 총량의 법칙은 행복 총량의 법칙과도 같은 말일까?  

내 유년 시절이나 학창 시절에 시련은 없었으나 중년 시기에 시련이 집중되어 있었으니,  이제 앞으로의 시련은  없을까? 그렇다면 행복으로 계산하면 마찬가지일까? 평생 행복의 총량도 정해져 있다면, 지금 불행하다면 앞으로 꽃길만 있을까? '시련이 없다'는 '행복하다'라는 등식이 꼭 성립되는 건 아니겠지만,  시련이 없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할 거 같다.


태풍이 연달아 오는 한여름처럼 힘든 일이 폭풍같이 나의 삶을 덮쳤다. 나보다 훨씬 더 한 일로 힘든 분들도 많고, 나의 일은 뉴스에 나올 거리도 못 된다는 거 충분히 안다. 그래도 '시련 총량의 법칙' 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제 나의 시련은 어느 정도 채워졌다고 생각하고 싶다. 아이 일로 같이 울고 위로받을 수 있는 남편이 있어 감사하고,  양가 어머니 모두 자식이 병원비 걱정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살림이었음에 감사하고,  큰 아이 일로 눈물로 보내는 사이 잘 커 준 둘째 아이가 있어 감사하다. 앞으로 또 어떤 시련이 닥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현재 큰 시련이 없음을 충분히 즐기면서 '행복'으로 채워보고 싶다.




지금의 나는 날씨 좋은 날 남편과 바닷가 커피숍도 가고, 친구와 동네 산책도 하고, 새벽에 날 깨우러 오는 고양이 소리에 기꺼이 일어나고, 여드름 난 둘째 아이가 내가 한 밥을 맛있게 먹어주는 것도 고맙고, 브런치에 글 올리면 읽어주는 독자가 있는 것도 기쁘다. 내 인생 그래프는 현재 플러스 3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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