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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May 16. 2022

지리산에서 만난 너구리의 장례식

동물권 활동가 동료들과 함께 걷는다는 것

생명과의 만남과 이별, 그 속에서 매일을 고군분투하는 활동가






푸르른 5월의 지리산 경치도 즐기고, 1분기 동안 많은 동물들을 떠나보내며 지친 몸과 마음도 리프레쉬할 겸 지리산 둘레길  1박 2일 동안 동료들과 쉬엄 쉬엄 함께 걸었다.


둘레길을 걷다가 트레킹 코스 한가운데에서 죽은 너구리 한 마리를 만났다. 함께 길을 걷던 6인의 동료들 중 누구도 비명을 지르거나 끔찍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포함해 7인 모두가 가던 길을 멈춰 서서 너구리를 둥그렇게 에워쌌다.


너구리 몸을 관찰해 보이 생명체가 왜 여기서 죽었을지를 추정해 보며 안타까워했고, 자동차도 종종 지나다니는 이 길 한가운데 두었다가는 사체가 훼손될 것을 걱정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동료 중 한 명이 가방 속에서 비닐을 꺼내 장갑 대신 자신의 손에 끼우고, 사망한 너구리를 들어서 트레킹 코스 옆 나무가 우거진 곳에 뉘었다. 사체 위에 흙을 덮고 작은 꽃송이를 그 위에 올렸다. 다른 한 명은 죽은 동물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기도의 염원이 담긴 만트라 문구를 휴대폰에서 찾아내서 너구리 앞에서 읽어 주었다.


우리도 아직 갈 길이 먼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이제 그만 출발하자고 재촉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너구리에게 "잘 가라, 흙으로 돌아가라, 고생했다" 등등의 따뜻한 말들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그저 말없이 모든 과정을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너구리를 추모했다.


너구리뿐만 아니었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목줄에 묶인 시골 개도 만나게 된다. 평생 1미터 목줄에만 매여 살며 외로움을 견뎌내고 있을 시골 개들에게 깨끗한 물이라도 주고 싶어, 길을 걷다 말고 물그릇을 제 손으로 깨끗이 닦아서 새 물을 채워주는 이들이 지리산을 함께 찾은 나의 동료들이었다. 혹시 몰라 챙겨 온 동물 간식을 꺼내어 한 입이라도 먹여주고 나서야 다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이들과 함께 일하고 있구나,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지리산의 자연 속을 함께 걷고 있구나, 고맙고 벅찼다. 1박 2일 내내 우리는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작은 올챙이들 만으로도 즐거워했고, 각양각색의 꽃들을 보며 감탄했다. 반짝이는 나뭇잎과 상쾌한 바람 행복해하는 동료들과 같이 걷는 길은 기대한 것보다도 멋진 시간이었다.


활동가 동료들과 1박 2일 지리산을 함께 걸으며 너구리는 물론 들쥐, 개구리, 작은 곤충 등 죽어간 생명들을 많이 만났다. 논 위를 천천히 날아가던 백로, 숲 속에 몸을 숨긴 고양이, 앵두를 따먹던 까마귀도 마주쳤다. 삶과 죽음이 지리산 속에 다채롭게 존재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서로 이길 필요도 잘난 체할 필요도 없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었다.


동물권 활동가로 일하는 일상은 감정 소모가 크다. 각각의 사연을 가진 동물들을 구조하고 돌보며 가슴 아파하고, 거대 산업 자본에 시민활동이 가로막혀 좌절하기도 하고, 잔혹한 범죄 사건으로 희생된 동물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분노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소진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 나에게 치유가 되는 곳이 지리산 둘레길이었다. 정상에 도착하기 위해 계속 위를 향해 걸어야 하는 일반적인 등산과 달리 둘레길은 그만의 매력이 있다. 굽이 굽이 이어진 길을 걸으면서 작은 마을을 지나기도 하고 길을 통과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풍경들을 볼 수 있다. 일정을 여유롭게 짜면 많이 지치지 않으면서도 머리를 비우기에 좋다.


우연히 던진 제안에 그 길을 함께 걸어준 나의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동안 동물들을 위해 일하며 차곡차곡 쌓였을 슬픔과 아픔을 잠시나마 내려둘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착하고 계산할 줄 모르고 그저 동물밖에 모르는 나의 동료들이 누구보다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한다.


물론 앞으로도 현실의 벽 앞에서, 혹은 고통받는 동물들을 마주하며 눈물 흘리고 상처받는 날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번 지리산 둘레길 여행에서처럼 같이 다독이며 오래 함께할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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