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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앤 Mar 19. 2022

 별이 빛나던 밤에

(별에 얽힌 첫 번째 별별 이야기)

 새벽 한 시, 문득 별이 보고 싶어졌다.


 베란다 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어디에도 별은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자동차, 수많은 간판에서 쏟아져 나오는 휘황찬란한 불빛들. 꺼질 줄 모르는 도시의 불빛은 밤하늘의 옅은 빛까지 모두 삼켜버렸다.


 어린 시절 매일 밤 빛나던 별은 이제 이 도시에서는 제대로 볼 수 없다. 볼 수 있다 할지라도 그 빛은 반짝임을 잃은 희뿌연 안개처럼 느껴질 뿐이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잠들지 못하던 밤 세었던 수많은 별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밤하늘의 별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며칠 전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읽으며 이제는 추억이란 이름으로 남아있을 수많은 별들을 떠올려 보았다. 어쩌면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밤하늘의 별보다 더 반짝이고 있을 별별 이야기들. 쉬이 눈감지 못하는 밤, 추억의 별을 찾아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수많은 장면이 담긴 기억 속 필름은 여러 번의 되감기 끝에 여덟 아홉 살 쯤의 어딘가에서 멈춰 섰다.




 어린 시절 나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당시에는 여느 시골집처럼 우리 집도 마당 한쪽 구석에 재래식 화장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녹이 슨 낡은 초록빛 문짝에 하얀 정자체로 ‘변소’라고 떡 하니 쓰여 있던 오래된 화장실. 자다가 오줌이 마려우면 마루에 놓인 요강에 쉬 하면 그만이었지만 간혹 똥이라도 마려운 날에는 참고 참고 또 참아야만 했다. 그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후다닥 변소로 내달렸다. 어쩌다 설사라도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끔찍한 밤과 새벽을 오가야만 했던 것이다.


 기억 속 그날도 설사병이 나서 초저녁부터 변소를 들락날락했다. 부글부글 끓는 배가 잠잠해지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윽! 새벽  두 시쯤 뱃속에서 슬슬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그나마 좀 믿을만한 작은언니를 깨웠다. 언니 둘과 같은 방을 썼지만 나이 차가 많은 큰 언니는 아무래도 좀 어려웠다.

 언니 언니, 나 똥 마려.
무서우니까 같이 가자. 응?

 자그마한 목소리로 언니 등을 콕콕 찔러 댔다. 처음에는 못 들은 척 돌아눕던 언니는 이내 짜증을 내며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번에는 좀 더 강도를 높여 두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았다. 언니는 분명 꾸역꾸역 일어나 잔뜩 구겨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을 것이다. 방안에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도 벌처럼 쏘아대던 언니의 표정만은 또렷이 느껴졌다.


 잠을 깨운 자를 향한 언니의 날카로운 눈초리와 짜증. 그것들을 묵묵히 받아내고 사정을 한  끝에 언니와 함께 변소로 향할 수 있었다. 행여 식구들이 깰까 최대한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도둑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마룻바닥을 밟고 나와 마당 끝에 다다랐다.


 변소 위에 매달린 자그만 백열전구도 언니 손에 들린 손전등 불빛도 칠흑 같은 어둠을 이길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모기들은 내 여린 피부를 마구 공격해댔고, 지독한 똥냄새는 휴지로 막아 놓은 콧구멍 빈 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모기떼와 코를 찌르는 냄새와 쭈그려 앉은 다리에서 느껴지는 찌릿찌릿한 근육통.


 하지만 이 세 가지 고통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똥통에서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변소 귀신의 공포였다. 유독 겁이 많았던 나는 친구들이 말하던 그 변소 귀신이 나타날까 봐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언니가 가까이 다가와 "언니 있으니까 괜찮아"라고 다독여주길 바랬지만 언니의 그림자는 내게서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언니의 동행이 고맙기는커녕 냄새난다며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모습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언니는 생각만큼 믿을만한 사람이 못되었다.

“아직 멀었어? 빨리 좀 나와. 야! 나 들어가 버린다.”

변소 귀신의 공포는 끊임없이 나를 재촉하던 언니의 사나운 목소리까지 집어삼켜 버렸다. 


 그 무섭다는 변소 귀신, 홍콩할매 귀신이 나타나 금방이라도 냄새나는 똥통 안으로 나를 잡아 끌어내릴 것 같았다. 무서움을 느끼면서도 활짝 열어놓은 변소 문 너머 하늘에서 반짝이던 별빛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우와? 저기 저 별들 좀 봐. 진짜 진짜 예쁘다.'

혼이 쏙 빠져나갈 것 같은 무서움 속에서도 별빛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었다니. 외부 세계가 주는 자극에 열심히 반응하던 나의 감수성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나 보다.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이 쏟아내던 빛은 어느새 변소 귀신의 존재까지 잠식시켜 버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어진 온몸의 신경다발은 어느 한 구멍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두려움도 잊어버린 두 눈은 어느새 밤하늘 별빛 속에 빠져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별빛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껴 본 날이었다.




 어둠 속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신비롭게 바라봤던 밤하늘. 내게로 쏟아져 내릴 듯 반짝였던 수많은 별들. 어려서부터 눈물도 많고 겁도 많았던 나. 밤에 귀신이 나올까 두려워 잠까지 설쳤던 나. 눈물 많은 겁쟁이의 무서움까지 달래주었던 그 아름다운 별빛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별빛을 찾아 헤매던 눈을 멈추고, 가만히 밤하늘을 바라다본다.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한 공간,  멀리 어디쯤에서 무서움에 떨고 있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흐릿하게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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