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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앤 Jun 24. 2022

포슬포슬 감자 일기

누군가의 수고만큼 감자는 맛있어진다


일요일, 뜨거운 햇별 아래서 감자를 캐다


 따가운 6월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푸른 산자락 아래 너른 밭에서는 감자 캐기가 한창이다. 아이 주먹만 한 것부터 어른 주먹보다 큰 감자까지 세상 밖으로 나온 동글동글 감자들이 밭고랑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저기 저 허리 숙이고 있는 여인네는 우리 엄마, 긴 막대 들고 서 있는 건장한 사내는 작은 형부일 테다. 흙밭에 놓인 흰 운동화 주인은 언니일 것이고, 나뒹구는 분홍 바구니는 네 살배기 조카가 내팽개쳐 놓았을 것이다. 언니가 올린 사진 한 장에도 이렇게 누군가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땅 위의 흔적 속에는 여름 땡볕에서 감자 키우느라 고생한 가족의 땀과 노고가 남아있다. 그 수고를 너무도 잘 알기에 미안함이 자꾸만 커져간다. 나는 항상 그들의 땀과 수고로 거둬들인 수확물들을 편히 받아먹기만 다. 차곡차곡 쌓인 미안함이 너무도 커서 가족 단체톡에 올라온 사진 아래 답글 다는 것도 망설여진다. 뭐라고 써야 할까? 머뭇머뭇하다 결국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하루를 넘겨버렸다.


 부모님과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매번 작은 오빠와 작은 언니네가 시골에 내려가 농사일을 거든다. 일손을 많이 보탠 자식이든 아니든 다섯 아들 딸들 손에 들어가는 농작물의 양은 비슷하다.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노동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매번 똑같이 무언가를 받는다는 것이 어째 좀 부당하고 염치없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량에 비례해서 수확물을 받아야 한다면 내가 가장 적게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나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가득 안고 살면서도 내 생활을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철딱서니 없는 막내딸은 아무래도 언니처럼 마음씨 좋은 효녀가 되기는 애초에 글러 먹은 것 같다.



월요일, 자식들에게 감자를 보내다


 "막내야! 오늘 택배 보냈으니까 내일쯤 감자 도착할 거야. 한 박스 가득 담았으니까 시누이네도 나눠주고 우리 손주들 맛있는 것도 많이 만들어주고 그랴. 택배 받으면 까먹지 말고 꼭 전화하고"

엄마는 올해 감자가 유난히 더 맛있다며 애들 좋아하는 감자튀김도 해줘라, 소금 좀 넣고 감자 쪄서 먹으니 달짝지근하고 아주 맛나더라, 혹시 다 못 먹겠으면 싹 날 때까지 그냥 두지 말고 친한 아줌마들한테도 좀 나눠줘라 일장 연설을 하신다. 무심한 딸내미는 잘 먹겠으니 알았다며 바삐 전화를 끊어버린다. 내가 엄마 말에 너무 건성으로 대답했나? 성급히 전화를 끊어 버렸나? 뒤늦게 마음에 걸려 저녁 먹고 엄마한테 전화하니 아빠가 대신 받는다.

"엄마가 아침 일찍부터 밭에 나갔다 와서 그런가 많이 고됐나 봐. 벌써 잔다. 내일  택배 들어가니까 받으면 전화하고 너도 쉬어라."


 빈 속에 약을 털어 넣은 것 마냥 속이 쓰리다.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지쳐 쓰러지듯 잠든 엄마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엄마 전화에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후다닥 끊어버린 못난 내 모습이 한없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화요일, 포슬포슬 잘 삶아진 감자는 맛나다


 외출했다 돌아오니 문 앞에 감자 한 상자가 놓여있다. 이번에는 깜박하지 않으려고 상자를 들여놓기 무섭게 엄마에게 바로 전화했다.

"엄마! 방금 감자 받았어. 감자가 엄청 맛있어 보이는데 애들 오면 바로 삶아줘야겠다. 진짜 진짜 잘 먹을게요. 감사해요."

무심했던 어제 일을 조금이라도 만회해 보고자 평소의 무뚝뚝함을 버리고 밝은 목소리로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엄마는 우리 막내가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어 목소리도 밝고 말도 많냐며 내심 기뻐하신다.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깨끗이 씻은 감자를 소금 한 꼬집과 함께 냄비에 넣고 삶았다. 보글보글 물이 끓어오르고 감자가 익기 시작하자 달콤한 감자 향이 콧속을 간질인다. 냄비 물이 거의 졸았을 무렵, 가뭄에 마른땅이 쩍쩍 갈라지듯 벌어진 껍질 사이로 뜨거운 김이 올라온다. 하얀빛이 도는 노르스름한 속살이 손 닿으면 부서질 듯 포슬포슬하니 먹기도 전에 침샘이 고인다. 둘째는 달달한 설탕에 찍어서, 첫째는 신김치 하나 얹어서 정말 맛나게 감자를 먹었다. 삶은 감자를 좋아하지 않던 둘째도 오늘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농사지은 거라 그런지 더 맛있다며 감자 두 개를 너끈히 해치웠다.


 배가 빵빵해진 두 딸들은 엄마 등쌀에 못 이겨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감자 삶아서 진짜 맛있게 잘 먹었어요. 감자 많이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아빠는 손주 녀석들 전화에 아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힘들어도 농사짓기를 잘했다고, 내년에도 감자 많이 심어서 우리 새끼들 보내줘야겠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수요일, 부드러운 감자 샐러드에 반하다


 오늘 저녁 메뉴도 역시나 감자다. 마트에서 사면 은근히 비싼 감자, 이렇게 넉넉히 있을 때 그동안 못해먹은 감자 요리 다 해 먹어 보리라 다짐하며 감자 샐러드를 만들었다. 잘 익은 감자를 볼에 넣어 으깬 다음 달걀, 오이, 당근, 후추, 마요네즈와 머스터드를 넣고 골고루 섞어주면 보들보들 달콤 짭조름한 감자 샐러드 완성이요. 보슬보슬 부드러운 감자와 아삭아삭 씹히는 오이의 조합은 백만 번 칭찬해도 아깝지 않을 찰떡궁합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둘째가 열심히 비비고 섞어준 덕분인지 샐러드가 훨씬 더 맛있어진 것 같다. 하지만 감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둘째는 샐러드는 쳐다도 안 보고 샐러드 맛에 푹 빠진 첫째만 아주 맛나게 두 접시나 먹어치웠다. 신랑과 나도 고소하고 보드라우면서도 아삭한 감자 샐러드에 반해 연신 숟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딸아, 정말 정말 맛있다며 내일 또 해달라는 네 말에 이 엄마는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누리호 타고 우주로 슝 날아갈 뻔했단다.



목요일, 비 오는 날에는 부침개가 진리다


 아침부터 무겁고 축축한 공기가 세상을 잔뜩 짓누르고 있다. 회색빛 구름이 점점 어둡게 물들더니 굵은 빗줄기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런? 오늘처럼 습기 많은 날 튀김은 금방 눅눅해지기 마련이니 아무래도 감자튀김은 다른 날로 미뤄야겠다. 비 내리는 목요일, 오늘 저녁 메뉴는 감자전이다. 타닥타닥! 토도도독! 빗방울 소리 들려오는 오늘 같은 날에는 바삭바삭한 부침개 꼭 먹어줘야지. 얇게 채 썬 감자를 달궈진 프라이팬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주면 바삭한 식감 자랑하는 맛난 감자전을 맛볼 수 있다. 샐러드는 손도 안 대던 둘째도 감자전에는 자꾸자꾸 손을 뻗는다. 바사사사삭! 씹을 때마다 고막을 타고 흐르는 바삭한 소리에 나는 절대적 행복을 만끽하며 먹고, 먹고, 또 먹는다. (저녁을 이렇게 많이 먹으면 안 되는데 생각 없이 마구마구 먹어버렸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감자송


"난 감자 샐러드가 너무 좋아, 냠냠 쩝쩝 정말 맛있어."

어제저녁, 첫째는 감자 샐러드를 먹으며 노래인지 랩인지 모르겠는 말을 내뱉으며 둠칫 둠칫 어깨를 들썩거렸다.

'저 녀석이 저렇게 흥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흠, 어깨춤이 절로 날만큼 그렇게 샐러드가 맛있었나?'

오늘 저녁에는 감자전을 먹던 둘째가 설마 이게 랩일까? 자꾸만 의구심이 들게 하는 흥얼거림을 쏟아낸다.

"감자전, 감자전! 바삭바삭 맛있는 감자전! 예~"

장르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노래는 할머니, 할아버지 노고에 감사하고 맛있는 감자를 찬양하는 세 모녀의 자작곡 <감자송>을 탄생시켰다. 우리는 이 노래를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열심히 감자 농사를 지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 바치기로 했다.


 띵동 띵동 택배가 왔어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열심히 농사지은 감자가 왔어요
부드러운 감자 샐러드 너무 맛있어
바삭바삭 감자전도 정말 맛있어
엄마 엄마 엄마
내일은 감자튀김 꼭 해주세요
우리 집에 감자가 아주 많아요
싹 나기 전에 열심히 먹어야지요
오늘도 내일도 맛있게 맛있게 먹을 거예요
할아버지 할머니 고맙습니다



 잠자리에 누워 핸드폰으로 감자 요리를 검색해 본다. 감자로 만든 음식이 이렇게 많았었나? 요리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참 넓고 다양하지만 내가 따라 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이내 핸드폰을 닫는다. 레시피고 뭐고 간에 감자 한 상자가 떡하니 들어차 있으니 반찬 걱정 그칠 날 없는 전업주부에게는 얼마나 큰 힘이 되고 든든한지. 볼 때마다 아주 흐뭇하고 마음이 충만해진다.


그나저나 내일 저녁은 감자로 뭘  먹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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