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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기혜 Nov 06. 2022

수선화 닮은 사람

 삼우제를 끝내고 엄마 집으로 가서 시노트를 찾았다. 엄마는 종종 스프링 노트 한 권을 펄럭거리며 “캬-! 이거 봐라. 끝내주지 않니?” 하고는, 옮겨 적은 시 한편을 들려주려 했었다. 나는 엄만 아무거나 다 좋다 한다며 자리를 뜨느라 끝까지 들은 시가 없었다. 엄마가 내 앞에서 흔들었던, TV 옆에, 소파 구석에, 된장 담그던 옆에 놓아두었던 노트를 챙겨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선화」 이해인     


초록빛 스커트에

노오란 블라우스가 어울리는

조용한 목소리의

언니같은 꽃     

해가 뜨면

가슴에 종을 달고

두 손 모으네     

향기도 웃음도

헤프지 않아

다가서기 어려워도

맑은 눈빛으로

나를 부르는 꽃     

헤어지고 돌아서도

어느새

샘물 같은 그리움으로

나를 적시네     


  10년 전, 엄마는 마당에 꽃이 피고 산이 둘러싼 집으로 갔다. 딸들의 마음에 날이 징징 벼르고 있어 딸들이 입을 열면 얼음장이 쏟아지는 걸 몇 번 겪은 무렵이었다. 엄마는 아주 어릴 때 살았다던 정원있는 2층 양옥집을 떠올리며 산으로 가서 마당 딸린 집을 짓고 시를 모았다.

꽃이 피는 집에서 시를 옮겨 적으며 산 지 10년, 엄마는 병원에 갔다가 치료를 중단하겠다는 서명을 했다. 호스피스 병동의 콜을 기다리는 동안 괜찮으시냐 묻는 간호사들에게, “간호사님은 어떤 의미에서 괜찮은 걸 생각하는 걸까?” 되물었다. 그리고서 나는 그림 같은 집에서 왔고, 간호사님도 우리집을 보러 오면 좋고, 간호사님 걱정 안 해도 되게 난 좋은 데로 갈 거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다 잘 될 거라고 했다. 꽃 얘기라면 엄마가 조금 더 살자고 마음을 돌릴까 싶어 엄마 방 앞 생강나무에 새순이 돋는다고 전했다.

“아! 나왔어? 생강나무 피기 전에 가야지. 걔 나오면 다른 꽃들도 계속 나와. 다 보면 1년 있어도 못 죽어.”

“좀 더 보면 좋지. 곧 우리 새 차도 나와. 가고 싶은데 있어?”

“신륵사. 그런데 자연은 갈 때 망설임이 없어. 가차 없이 떠나. 오늘 있던 꽃이 내일은 없다.”

엄마는 봄꽃이랑 숨바꼭질이라도 하려고 했는지 꽃보다 먼저 달려 떠났다. 엄마가 사라진 마당에는 아직 아무 꽃도 안 나왔으려니 했는데, 수선화가 활짝 피었다. 해도 달도 제일 먼저 닿는 자리였다. 꽃잎은 시인의 말마따나 스무 살 봄에 차려입는 블라우스 같고, 잎은 난초처럼 가늘고 매끈해서 겨울 흙을 뚫고 돋았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그늘 시원한 여름 물가에나 어울리게 생긴 애가 아직 추운데 왜 먼저 피었나. 나무가 붙들어주는 산수유도 벚꽃도 아직인데, 무얼 맞자고 벌써 나왔나.    

      

  1월에 병원에 들어간 엄마가 봄보다 서둘러 떠나려 하니, 소식을 들은 이모들과 오랜 성당 친구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갑자기 중요해진 기억을 꺼내었고 나는 그 속으로 내 기억을 들고 들어갔다.     

  외할아버지는 지역 유지 집안에 태어나 돈은 쓰고 빌려줄 줄만 알았지 벌 줄은 몰랐다 했다. 부잣집 고명딸이었던 외할머니는 부산에서 옷이며 파마를 손가락 안에 들게 하고 다녔는데, 어려서 결혼한 탓인지 여덟 자식을 낳고도 큰일이 있을 때마다 아기처럼 자식 뒤로 숨었다 했다. 착실한 사람이 차곡차곡 벌어가던 시절과 달리, 있는 돈을 허물며 살았던 할아버지는 세상일이 안 풀린 화를 집에 와서 자식들에게 풀었단다. 큰이모는 동생들을 고자질하는 것으로 살길을 찾았기 때문에, 둘째인 엄마가 여섯 동생을 거느리고 그 화를 맞았단다. 나는 엄마 밑에서 다 자라 어른이 되었는데, 집에서와 다르게 밖에서는 종종 능력을 인정받는 일이 생겼다.

“엄만 어떻게 나 같은 자식을 칭찬 한마디 안 하고 키울 수 있어?”

“칭찬, 그거 다 어른이 너 이용하는 거야. 좋을 때 칭찬하다가 어려울 때 어려운 일 시킬라고. 난 너희들 지키려고 일부러 칭찬 안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동네방네 우리 엄마 자랑을 해 놓고, 나중에는 사람들 앞에 돈 심부름을 보냈단다. 내가 진로를 고민하느라 여기저기 친구들 소식을 기웃거릴 때였다.

“다른 부모들은 유학 가라, 하고 싶은 거 해라 그런 말 한다던데, 엄마는 내가 하고 싶은 거 얘기하면 왜 꼭 안 된다 그래?”

“고생 모르는 사람이 하고 싶은 거 하다 망하면 온 식구 같이 망하는 거야. 너가 무슨 고생을 알겠니.”

  하고 싶은 거 다 하다가 족족 망하는 아버지와 삼촌들을 보고 자란 엄마에게 꿈은 뻥으로 들렸을까. 그 무렵 남자친구는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을 알아보고 있었다. 일찍 부모님과 동생의 생계를 돕던 사람이었다. 엄마는 데이트 가는 나를 불러세웠다.

“걔 혹시 하고 싶은 거 정했으면, 내가 등록금 대준다 해라.”

“엄마가 왜 오빠 등록금을 대줘?”

“너는 내가 다 해주잖아. 부모 때문에 하고 싶은 거 못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니?”

그 날 나는, 딸에게는 다 안된다고 겁을 줬으면서 대체 남은 왜 무턱대고 주냐고, 무슨 엄마가 이러냐고 악을 썼다. 엄마는 정말이지 너 필요한 건 내가 다 해줬는데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는 ‘너 좋다는 사람 마음 아픈 줄도 모르는 걸 보니, 너는 아직 결혼할 그릇이 아니’라고 했다. 듣지는 않고 내 그릇을 들먹이는 엄마한테 미치고 팔짝 뛰었다.     


 병원에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살면서 제일 기뻤던 일이 뭐야?”

“네 언니 결혼할 때. 아무것도 없이 시집와서 내 자식 이만큼 키우고 이쁘게 입혀서 다 해주고 시집 보낼 때. 그때 제일 기뻤어.”

그 징글징글한 다 해줬다 소리. 엄마의 ‘다 해 주었다’는 ‘딸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었다’가 아니라 ‘엄마가 원하던 것을 다 해주었다’인 것을 알지만, 주어나 목적어를 따지기엔 나도 엄마가 되어 그런 것을 헤매는 중이라 마음이 물러섰다.

“그럼 제일 가슴 아픈 일은?”

“그 날, 내 엄마가 와서 참 애썼다고 할 줄 알았는데 돈이 없다고 했어. 돈 달라고. 잔치 끝나고 동생들 밥을 먹이는데 아무한테도 그 말을 할 수가 없었어. 하늘가서 만나면 그날 나한테 왜 그랬냐고 따지고 싶어.”

엄마는 언니와 나에게 정리할 것들을 일렀다. 조카들 중에 결혼 안 한 아이들 앞으로 축의금 봉투를 만들라 했다. 서른 중반이 넘은 사촌부터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막내까지 줄줄이다. 엄마는 내 동생들이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줬다고 서운해하지 않게 꼭 사람 수 맞춰 챙기라 했다. 5년 전에 한 번 쓰러졌을 때 살 날이 얼마 없을까 봐 동생들 통장으로 다 넣었는데, 왜 줬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더라고. 동생들이라 언니가 주는 건 받기만 하고 잊은 것 같으니 다시 주라는 거였다. “줬던 걸 왜 또 줘?” 묻자, 이제 이모들과 인연은 잊고 살라는 답만 돌아왔다. 동생들은 이리 돌보고 자식들은 저리 지키다 지쳐버린 건지, 엄마는 둘을 떼어놓으려 했다.    


  엄마의 오랜 성당 친구들이 찾아왔다. 친구를 보내는 슬픔 대신 서로 친구가 되던 때의 기쁨을 챙겨오셨다. 남편 따라 깡시골에 살게 되어 힘들었는데, 안젤라가 시금치나물을 한 광주리 만들어 나와서는 동네 새댁들을 불러 조물조물 나누어 주더란다. 그게 맛있고 따뜻해서 서울로 이사 올 때도 안젤라 동네를 묻고, 같이 성당에도 다녔단다. 다른 분은 성당에서 장애우 봉사 모임에 들어갔는데, 안젤라가 일은 별로 없고 양재시민공원으로 나오면 된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불고기 이백 인분을 혼자 나르며 어서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안젤라씨 딸’로 자랐다. 엄마는 주일학교 자모회장을 종종 맡았다. 한 번은 여름 캠프를 갔는데 엄마가 다른 엄마들을 2개 조로 교대시키며 2박 3일 동안 어린이와 교사들 삼백 명을 먹였다. 내 엄마가 밥을 해준다니 먹고 싶은 걸 말해도 되나 싶어서 마지막 날 탕수육을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엄마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란다. 캠프 마지막 날은 남은 재료 다 썰어 놓고 무조건 카레란다. 어차피 먹고 싶은 메뉴도 못 고르는데 캠핑장 부엌에 내 엄마가 있은들 무슨 소용인가. 엄마가 바쁘니 배낭은 혼자서 싸야 하고, 다른 아이들이 공중전화에 줄을 서도 나는 전화 걸 데가 없고, 주는대로나 먹으니 좋을 게 없었다. 우리가 주일학교를 가지 않는 나이가 되자 엄마는 자모회장은 그만두었고 장애우 봉사를 했다. 교구에서 계획한 장애우 봉사 조직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엄마는 또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나섰다. 교구가 정해둔 봉사를 받으라고 하지 말고, 장애우들이 원하는 걸 해줘야 한다며 자모회 시절 알게 된 서울 각지의 엄마들을 모아 운전대를 잡았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도서를 배달해 주고, 글을 받아 문집을 만들어 주고, 그들이 만나서 놀 수 있게 운전을 해주는 내용이었다. 모임이 열리는 장소는 주로 우리집 앞 5분 거리 성당, 우리집 가까운 양재시민공원, 우리집 근처 청계산 같은 곳이었다. 학교 갔다 오면 집은 늘 비어있었는데,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면 전화가 왔다.

“기혜야. 엄마 식용유 모자르다. 한 통 사와라.”

엄마는 쿠킹호일이 모자르고, 당면이 한 봉지 모자르고, 바쁜 데 사람이 모자랐다. 엄마의 전화를 받고 나가도 엄마는 보이지도 않았다. 앞치마를 맨 아무 어른에게나 가서 “저 안젤라씨 딸인데요, 엄마가 이거 갖다 달라 해서요.”하면, 그 분이 “응, 그래. 안젤라씨 딸!”이라고 말해야 심부름이 끝났다. 중고생 시절에 안젤라씨 딸이라고 먼저 소개하며 다녀야 하는 것도, 엄마가 내 성적도 진로도 묻지 않고 밖에만 있는 것도 다 별로였다. 엄마가 큰 행사를 마치고서 식탁에 앉아 속상한 듯 말했다.

“봉사 그거, 말이 없어 봉사라고 부르는 거지. 봉사도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람이 봉사를 하기로 했을 때는 그 사람 마음에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말이 봉사지, 자기가 필요해서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봉사했다고 티 내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어떤 아줌마가 일 끝나고 생색을 내서 엄마가 속상했나 보다 싶었다. 내 엄마 마음에는 무슨 이유가 그리 많아서 집에 들어올 수도 없을 만큼 봉사를 하고 다니는지 궁금하지는 않고, ‘맞아. 엄마도 재밌어서 놀러 다니는 걸로 보이니까, 봉사 아닌 게 맞지. 그럼그럼.’ 생각했다.

  엄마가 죽고 엄마의 금융거래기록을 정리했다. 우리한테는 무심하고 이웃들한테는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여기저기 기분 좋게 잘 쓰면서 살았겠지 싶었다. 은행에서 받아본 기록에는 생각보다 지출이 없었다. 우리 식구 생일마다 각자의 계좌로 넣은 돈들이 크고, 나 집 살 때 보태준 돈이 제일 크다. 그 밖에 만원, 2만원, 3만원이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으로 찍혀 있다. ‘홀트아동복지회’, ‘빈곤가정 주거지원’, ‘저소득층 청소년 문화 활동 지원’ 같은 것들이다. 어떤 것은 매달 꾸준히 나갔고 어떤 것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엄마가 산속에서 TV를 보다가 지금 후원해 달라는 안내가 나오면 텔레뱅킹을 했나 보다. 목록들은 일관되게도 어린 엄마를 향한다. 엄마는 육성회비가 없었다 했다. 겨울이 되었는데 교복 동복을 사지 못했다 했다. 친구들이 떠나는 가족 여행을 별나라처럼 상상해 봤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더부살이 온 먼 친척 아이를 쫓아낼지 말지 결정을 엄마에게 맡겼고, 엄마는 동생들이랑 살기도 벅차서 같이 살기 싫다고 했단다. 그 아이는 엄마랑 동갑이고 노래를 잘했는데, 엄마는 그 뒤로 TV를 볼 때마다 노래를 잘 하는 또래 남자가 나오면, 혹시 자기가 내쫓은 아이인지 유심히 보고 듣고 했단다.

돌봐주고 지켜주는 어른을 보고 자라지 못했던 엄마는, 어른이 될 차례가 되었을 때 킹왕짱 어른 상상놀이를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두 딸 아니라 이백 명, 삼백 명 되는 아이들이 먹고 놀 수 있는 밥을 짓던 엄마는 항상 신이 났다.

“으쌰으쌰! 쿵짝쿵짝! 나한테만 맡기면 이백 명이던 삼백 명이던 딱딱 맞춰 장보고 팍팍 먹인다! 나, 안젤라는 끝~내주게 일을 하지!”

나만 보는 거실에서 엉덩이 춤을 췄다. 엄마는 그렇게 다시 가보지 못할 과거의 어린 자신을 먹이고 돌보고 놀러 보냈다.

엄마가 오는 전화를 마다할 만큼 기력이 안 남았을 때, 마지막으로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려서 병을 앓아 장애를 얻었고 그 후로도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겪었다. 몸이 불편해 엄마를 보러 오지 못할 것이었다.

“응, 작은 누나다. 동생들 말 잘 듣고. 나쁜 데 가지 말고. 아무나 따라가지 말고. 좋은 데만 다녀라. 그래, 알았다. 잘 있어라.”

삼촌이 애가 타서 왕왕 소리치는 것과 달리, 엄마의 목소리는 힘이 있고 차분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몰랐다. 남편과 자식이 있는 주부는 형편이 나아져 세컨카를 가져도, 하루 사이 갈 수 있는 곳은 동생 사는 집이 아니라 고작 우리 동네뿐이었다는 것을. 엄마가 8년 동안 서울 시내를 휘젓고 다니면서 엄마만한 덩치들을 업고, 들고, 휠체어에 태워 밀던 기운이 누구를 향해 솟아났는지를. 엄마는 관절염이 시작되어 한 장애우를 화장실에서 놓칠 뻔했던 것을 끝으로 봉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는 흔들의자에 앉아 TV를 보며 만원, 2만원, 3만원을 어린 엄마에게로, 아픈 동생에게로, 엄마가 쫓아냈던 아이에게로 죽을 때까지 보냈다.

“엄마, 엄마 죽으면 묘비에는 뭐라고 적어?”

“신성희 안젤라. 다른 건 적지 마라.”

엄마는 킹왕짱 어른의 이름으로, 동생을 세상에 데리고 나가 놀던 누나의 이름으로 묻혔다.     


  엄마의 수선화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산속 깊은 밤을 향해 섰다. 여린 얼굴이 낯선 달을 향하는데 흔들리지도 피하지도 않는다. 성난 아비의 호령을 맞으러 먼저 나왔나. 곧게 선 줄기는 마당으로 작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나오지도 않은 제비꽃과 나뭇가지 뒤에 숨은 벚꽃이 수선화 그림자만 보고, ‘언니 거기 괜찮아? 우리, 나가도 괜찮아?’ 묻는다. 추운밤을 눈 맑게 뜨고 혼자 버틴 언니 꽃은 날이 밝자 입 굳게 닫아 밤사이 본 것을 감춘다. 늦게 나온 꽃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엄마는 피고 지는 꽃을 10년 동안 보며 되뇌인 것이 삶이었을까, 죽음이었을까. 나도 이모들처럼 엄마 등 뒤에 살았다. 뒷모습을 마음껏 서운해하며 엄마가 무얼 맞서 섰는지 보지 않았다. 삐지고 토라져서, 전화도 고운 말도 없이 엄마의 외로움을 거들며.

  엄마가 간다던 좋은 곳에는 수선화가 있을까. 그곳에서 수선화는 여름꽃이어라. 뒤에 피어날 꽃들의 언니도 엄마도 안 해도 되게. 그곳에서 수선화는 낮에 피어라. 태양 아래 다른 꽃들이랑 재잘거리게. 다시는 한 줌도 안 되는 등허리 춥지도 시리지도 말아라. 가슴에 달린 종으로 딸랑딸랑 어린 소리내며 생긴대로 살아라. 내 수선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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