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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기혜 Jun 16. 2022

우리 사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 사연을 어렴풋이 궁금해 하던 지인들이 오랜시간 궁금증을 하나 둘 채우고 나면 ‘뭐, 아무 일도 없었던 거네.’하는 그대로, 아빠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아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집에서는 그랬다. 그는 밥을 먹고 출근했고(인사도 없이), 퇴근해서 밥을 먹었다(말도 없이). 주중의 그 일이 무척이나 힘들었다는 듯 주말에는 잠만 잤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동작은 걷고, 눕고, 먹고, 신문을 펼치던 정도다. 그를 '우리 동상'이라 부르는 고모들은 자녀들에게 '무엇이든 삼촌에게 물어보라.' 일렀다. 걷고, 눕고, 먹고, 신문을 펼치는 행위에서 그가 조카들의 질문에 답할 수도 있는지는 내가 알 방도가 없었다.


어린 나는 저녁 식탁에서 지구 공전과 자전의 원리를 그에게 질문했다.  머나먼 우주 저 너머에 대해 물으면 그의 새로운 면을 천천히 탐험할 수 있으리라.  그는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맨날 밥그릇과 신문과 현관 구두를 내려보던 눈이라 그런지, 그 눈길은 어째 좀 째려보는 것처럼 되었다. 아빠는 우주가 멀었던 건지 딸의 머릿속이 멀었던 건지 길고 길게 설명했다. 나는 우주의 원리에는 관심이 없었던 터라, 어느 대목에서 깨달음의 탄사를 내야 할지 몰랐다. 애시당초 피니시 라인이 없던 설명은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에이 씨!”

설명은 그렇게 끝났다. 사촌 오빠와 언니들은 인생의 중요한 시점마다 찾아와 그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는데, 나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를 ‘전쟁이 나면 너희들한테 팔 다리를 잘라주고, 눈알도 빼어줄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세상도 우리집처럼 조용했다. 전쟁도, 누군가의 눈알을 뺄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상을 해 보았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 빳빳한 셔츠 칼라, 알맞게 위치한 벨트 버클, 잘 닦은 구두. 그가 팔다리를 잘라주러 총알을 뚫고 달린다. 방금 의사로부터 눈알을 빼야 한다는 선고를 들었다. 이제 그가 내게로 오는가? 신문을 볼 때보다, 밥과 국그릇을 볼 때보다 치켜올린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지 않는다. 초상화의 시선처럼 맞출 수가 없다. 그는 납작한 종이인형처럼 옆으로만 달려 지나친다.


언니의 대학 졸업과 아빠의 퇴직을 앞둔 여름 가족 여행을 떠났다. 지시어와 단답, 먼 산 보기를 번갈아 꿰어가며, 우리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동네 어귀에서 찰 옥수수를 사 먹고, 동강에 다다랐다. 내 집 거실에서는 왕왕대던 침묵을 강물 소리에 기댔다. 그가 강과 바람과 노을 사이로 말을 했다.

"난 참 좋은 아빠야."

바람이 우리 사이 정적을 지나 우리 가족이 다다를 미래를 향해 먼저 달렸다. 그렇다고 혹은 그렇지 않았다고 어느 방향으로도 답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뿌리를 서로에게 내린 나무처럼 말 없이 견뎌왔음을 알아서였을까. 바람은 우리의 침묵을 시간이게 해주려는 듯 불었다. 그의 말은 흘러가지 않고 내 마음에 걸렸다. 견뎌야할 침묵이 하나 더 늘었다.


그의 몸 밖으로 나온 말의 뿌리는 가족이 살 집을 마련했고, 자식 학비를 대주었으며, 도덕적으로 나쁜 일을 하지 않은 것에 담겼다. 하지만 나는 이제 자식 둘을 키워서, 그가 하지 않은 일의 목록을 그보다 길게 만들 수 있다. 집이 아빠면 주택공사도 아빤가, 돈이 아빠면 월드비젼도 아빠겠네, 아무 것도 안 하는데 죄는 어떻게 짓나. 마음 속에 뾰족한 것들이 돋아나 그를 향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밖에서 벌어다 준 밥을 27년 먹었고 우리 사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힘을 40년 길렀다. 그것은 염력도 되려나. 그에게로 향하는 날카로운 것들을 되돌리고 구부린다. 그게 날아온 줄도 모르는 그 앞에서 소용없는 흉기들이 투두둑 떨어진다. 이어서 상상한다. 주택공사가 제공한 주택 안에서 아빠가 무언지 모른채 배를 드러내고 잠든 아이를, 월드비젼의 구호를 받고 눈 맞춰 본 적 없는 후원자에게 납작한 사진을 보내는 아이를, 격렬히 아무 것도 안하는 사람들이 지키는 덜 해로운 세상을.


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혼자 된 그의 하루와 그에게서 멀리 떠나 온 나의 오늘도 지나가겠다. 서로에게 아무 해로운 일도 하지 않으려고 무지 애를 쓰면서. 바람은 ‘좋은 아빠’를 알고 있을까. 그를 둘러싼 침묵이 시간이게 해주려고 그 옆을 불어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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