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만난 김밥
제주 여러 김밥집의 밥은 질다. 때론 채를 썬 다시마, 자작한 시래기, 겹겹이 상추처럼 물기를 잔뜩 머금은 속이 들었다. 우리집 전기밥솥 안에는 김초밥용 밥을 지을 땐 평소보다 물을 적게 잡도록 눈금이 그어져 있다. 김밥은 고두밥이 진리인 줄 알았으니 제주에서 김밥을 사 먹다 오늘 이 집 밥물을 잘못 잡았나 싶을 때가 있다. 혹은 도시의 세련된 맛이 부족하거나.
그러다 새벽에 산 김밥을 한라산에 올라가 점심무렵 먹는다. 한 순간, 이 진밥이 정확히 무엇을 향하는지 알게 된다. 산을 오르는 사람, 섬의 동서남북을 오가며 농작물을 수확하는 사람, 올레를 걷는 사람, 바다로 나가는 뱃사람. 땀 흘린 후, 추위에 떨다가, 후딱 밥 먹고 이어질 밭일을 앞둔 사람의 목구멍이 메이지 않으며 김밥으로 채운 배가 몸을 움직일 때 거북하지 않도록 부드럽고 촉촉한 진밥이다. 애써 준비한 갖은 속재료 맛을 한 껏 살리려면 고두밥 사이 오래 씹히는 식감이 필요하겠지만, 이 김밥의 엔딩 무대는 단면을 뽐낼 식탁 위가 아니라 몸 쓰는 사람의 뱃속이다. 그래서인지 속이 축축한 김밥은 할머니가 반찬 얹어 말아주는 밥처럼 뭉게지는 느낌이 나는데 김밥집 바로 앞에서 까먹지 말고 한라산 꼭대기에서 먹으면 ‘맛있다.’소리가 절로 난다.
함께 넣어준 무짠지, 열량 높인 유부 튀김, 촉촉한 속재료 모두 땀 흘릴 하루를 맞은 사람들에게 알맞다. 은박지나 유산지에 두루룩 말아버린 포장도 마찬가지다. 한 손에 쥐고 운전하며, 올레를 걷다가, 오름과 한라산에서 먹기 좋다. 네모 반듯 상자 포장이라면 무릎에라도 올려놓게 앉을 곳을 찾아야 할 텐데 말이다.
내게 ‘이것이 김밥’이라고 알려주던 엄마는 김밥이 맛있으려면 고두밥을 지어야 한다고, 나중에 너도 김밥을 만들 때 물을 적게 잡으라 일러주었다. 엄마의 김밥은 날 좋은 날 소풍 도시락에 담겨서, 또는 친구들 부른 생일파티에 단면이 하늘을 보게 누워 그날의 화사함을 도왔다. 제주의 김밥은 엄마의 정의와는 맞지 않는데, 오늘 나의 하루를 헤아려 말아진 한 줄이라서 나는 이게 또 ‘김밥’이고, ‘엄마꺼 같은 김밥’이고, 사장님이 사람을 돌보고 기르는 사람임을 짐작하며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