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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교사의 첫걸음

- 임용되다

by Cha향기

학교는 내게 어색한 공간이었다.

나는 진작에 교사가 되었어야 했지만 22년 세월을 보낸 후에야 학교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래서 학교는 내게 익숙하지 않았다.

내 자녀가 학교 다닐 때 한두 번 기웃거려 본 게 전부다.

학교 운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턱이 없었다.

물론 오빠 내외가 교직에 몸담고 있긴 했으나 그것은 나와 별개였다.


그 무렵, 교사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교사가 되려면 몇 년 동안 치열하게 준비해야 했고

그렇게 하고도 교직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바늘구멍이 따로 없었다.

현직 교사라고 하면 대단한 관문을 통과한 사람으로 여길 정도였다.

드디어 나도, 교직에 몸담게 됐다.


- 그것 봐라. 내가 말했제? 니가 환갑이 되기 전까지는 나라에서 발령을 내줄 것이라고?

니, 아직 환갑 안 됐잖아?


내가 교사 발령을 받으니 어머니는 뛸 듯이 기뻐하셨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라는 말씀도 하셨다. 늦은 감은 있었으나 어머니께 효도한 기분이었다.


‘어머니, 그냥 된 게 아니에요. 제 영혼을 갈아 넣을 정도로 힘들게 준비했어요.’

라고 중얼거렸던 내 속엔 석연찮은 기쁨이 있었다.




대학에서 전공과목을 국어나 영어를 선택했던 친구들은

졸업과 동시에, 교직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는, 그들이 누렸을 교직 혜택을 20년 이상 누리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것에 대한 정신적 피해가 컸다. 기득권을 뒤늦게, 어렵게 찾은 셈이다.

우리에게 그런 권한이 없었더라면 부전공 연수 제도라는 특별법을 만들었을 리가 만무하다.

법에 어긋났으니 뒤늦게라도 그렇게 수습했다고 본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젊은 후배들에게 양심적으로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아니었더라면 몇 명이라도 더 교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역지사지의 맘이 생겼다.

사실, 당시에 이 제도에 대한 불합리성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 이듬해, 미발령 교사에게 임용고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다시 한번 더 주어졌다고 들었다.

임용고시 시험문제를 별도로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규모가 큰 중학교에 첫 발령이 났다.

요즘과 달리, 신규 발령이 꽤 많이 났다.

학년당 14 학급이나 됐다. 학급당 인원도 40명이 훨씬 넘었다.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중2 담임을 맡았고, 2학년 영어 교과 담당이었다.


같은 교무실에서 근무하는 동 학년 선생님을 통하여 담임 업무를 익히고

동 교과 교사로부터 영어 수업 전반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다.

학습지 준비하는 일이나 시험 원안지 작성법도 익혔다.

연구부에서 고사 원안지 작성 유의사항이 쿨 메신저로 전송되었고

별도로 꼼꼼하게 진행하는 고사 관련 연수가 있었다.

내가 맡은 업무 분장에 대해서는 담당 부장님에게 지도받았다.


그 누구도 나를 신규교사로 보지 않았다.

학생들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학교에서 이동해 온 줄로 여겼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또한 두려웠지만 학교 시스템에 자연스럽게 적응해 나갔다.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만큼이나 학교 일에 온 신경을 쏟았다.


"아빠는 교회주의, 난 개혁주의, 엄마는 학교주의야!"


학교 일에만 지나치게 신경 쓰는 나에게 아들이 했던 말이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모든 것을
차근차근, 하나씩 익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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