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여정의 시작
이 글은 #Ep.(1)~#Ep.(15)까지 연재될 예정이며,
저의 기독교 세계관을 개인적인 관점으로 정리할 계획입니다.
#Ep.(1) 유년의 뜰
#Ep.(2) 수박
#Ep.(3) 잔칫집
#Ep.(4) 대모
#Ep.(5) 은혜
#Ep.(6) 긴 방황
#Ep.(7) 결혼 제1 계명
#Ep.(8) 남편의 퇴직
#Ep.(9) 가장이 되어
#Ep.(10) 나일론 사모의 자유
#Ep.(11) 복음이 주는 고독
#Ep.(12) 교회 가는 길
#Ep.(13) 코로나가 덮친 교회
#Ep.(14) 믿음이 좋다는 말?
#Ep.(15) 영원을 향한 천로역정
내 인생의 창(窓 )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열렸다. 두메 시골에서 동생이나 돌보고 농사일을 거들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참 좋았다. 초가삼간에 살던 나에게는, 큰 건물인 학교도 신기했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것도 마음이 설렜다. 1학년 말에 보았던 시험에서 1등을 하여, 담임선생으로부터 ‘월남 공책’이라는 특별한 선물을 받아서 조금씩 우쭐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2학년 때, ‘선이’가 전학을 왔다. 선이는 무척 예뻤다. 흰 고무신을 신은 내 발 앞에 보였던 선이의 빨간 운동화는 예쁘고 고급스러웠다. 선이의 복숭아 같은 뺨을 보면 왠지 주눅이 들었다. 고무줄을 헐렁하게 넣어 만든 꽃무늬 치마를 입은 내게 선이가 입은 핑크빛 주름치마는 왜 그리도 예쁘게 보였을까?
선이네 집은 시장이 있던 면 소재지에 있었다. 윗마을에 살았던 나는, 아침마다 선이의 집에 들렀다. 선이네는 솟을대문이 있는 큰 집의 아래채에 세 들어서 살고 있었다. 위채는 댓돌이 놓여있었고 마루가 몹시 높았다. 그 집의 도로변에는 양장점을 하는 점포가 딸려 있었다. 선이 엄마는 중학교 영어 교사였고 아빠는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교사였다. 선이 외할머니가 선이와 그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선이네 친척, 옥희 언니가 밥과 빨래 등의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었다.
선이네는 플라스틱으로 된 소꿉놀이 장난감이 있었다. 장난감 솥이며 주걱이 앙증맞고 귀여웠다. 사금파리를 깨서 그릇으로 삼고 냇가의 큰 바위를 부엌으로 삼아 소꿉놀이를 하던 내게는 선이네 집에서 하는 소꿉놀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선이는 그림을 참 잘 그렸다. 12색 크레용으로 그린 나의 그림에 비하면, 54색 크레파스나 파스텔로 그린 선이의 그림은 어린 내가 봐도 멋있었다.
선이의 도시락에는 언제나 옥희 언니가 예쁘게 담아준 노란 계란말이 들어 있었다. 그런 반찬을 먹는 아이들은 화장실에 가서도 예쁜 변을 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춧가루도 제대로 무쳐지지 않은 푸르뎅뎅한 김치가 담긴 내 도시락을 선이 앞에 당당하게 펼쳐둘 수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학교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아이일 수도 없었고 더는 예쁜 아이가 될 수가 없었다. 선이네 집은 모든 것이 다 있어 보였고 정겨운 듯했다. 그래서 아침에는 물론이거니와 집에 돌아올 때도 참새 방앗간 지나듯이 선이네 집에 들렀다.
겨울이 다가오자 옥희 언니가 우리 조무래기들을 모아놓고 프로젝트를 하나 기획했다. 그것은 연극이었다. 연극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였지만 준비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순간이었다.
“이게 연극이란 거야, 언니가 하자는 대로 하면 돼.”
우리는 매일 연극 연습을 했다. 예수님, 마리아, 동방박사, 여관 주인, 천사 등이 등장하는 연극이었다. 우리는 그 언니가 지도하는 대로 각자가 맡은 역할을 했다. 기억이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나는 예수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것 때문에 선이가 약간 삐졌던 기억도 가물거린다.
“오늘 밤에는 부모님들이 오셔서 구경하실 거야. 그러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연습한 대로 잘하면 돼.”
한동안 연습했던 그 연극을 마을 사람들 앞에서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숫기가 없었던 나는 생각만 해도 떨리고 얼굴이 빨개졌다. 할머니와 부모님께 연극 발표에 대해서 말했다.
“묵고 살기 바뿐데 그런기 어디 있노? 니나 잘해라.”
엄마는 조무래기들이 연습하여 발표하는 연극 따위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엄마는 바빠서 그런 것에 시간을 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할머니와 몇몇 분이 지팡이를 짚고 어두운 밤길을 헤쳐서 선이네 집까지 왔다. 선이네 마당에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멍석을 깔고 앉아서 우리들이 공연하는 연극을 구경했다.
선이 네 집 앞에 있는 점포, 양장점 아가씨도 관객 중 한 사람이었다.
“너무 놀랍네요. 이번 크리스마스에 우리 교회에 와서 공연을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양장점 아가씨는 교회 반사(교사)라고 했다. 연극 공연을 하기 위해서 초청받아서 교회에 첫발을 디뎠다. 그 공연은 호응이 매우 좋았던 것 같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오세요. 여러분~”이라고 김 반사가 말했다. 처음 들어가 본 교회당은 새로운 세상처럼 멋있어 보이는 곳이었다. 교회에서는 찬송과 기도를 하며 예배를 드렸다. 반사 선생님이 재미있는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런 후에 연보(헌금)도 했다. 용돈을 아껴두었다가 10원짜리 몇 개를 연보 주머니에 넣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하나님과 예수님이라는 말을 들었다. 주일학교에 가면, 마을에서 했던 학교 놀이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일요일마다 황새골 바람을 맞으면서도 십자가 첨탑이 높이 솟은 그 교회당에 열심히 갔다. 물론 선이와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