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톡스 챙기는 남자

이런 남자랑 같이 늙으면 꿀이득이다.

by Lablife

혼자 팩을 하고 있으면 자긴 안 주고 혼자만 한다고 타박하는 남자

내 다이슨을 나보다 더 잘 쓰는 남자

보톡스를 주기적으로 맞는 남자


나의 남편이다. 연애초 남편이 자기를 열심히 가꾸는 모습에 타박하기도 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이렇게 세심한 남자는 남자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근데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심지어 남편이 자기를 스스로 가꾸고 나도 챙겨주는 모습에 감사할 따름이다.


며칠 전 남편과 함께 보톡스를 맞고 왔다. 6개월 전 한 번 맞고 이번이 두 번째이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는데 커플끼리 함께 온 사람은 우리 부부밖에 없었다. 함께 보톡스를 맞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어느 날 남편이 자기 이마 주름살이 너무 신경 쓰인다며 보톡스를 맞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좋다구나 나도 같이 맞겠다고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톡스를 맞은 건 10년 전이었다. 보톡스는 내게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름도 처음 들어본 미주신경성 실신이라나 알고 보니 주사에 대한 공포가 극도로 심각해서 일으킨 문제였다. 이 증상을 알게 된 건 대학생 때 헌혈을 했을 때였다. 다행히 이땐 헌혈을 다 끝마치고 침대에서 내려와 짐을 챙기러 걸어가는 길에 쓰러졌다. 그 뒤로 간단한 주사를 맞거나 할 땐 증상이 안 나타나서 안심하고 보톡스를 맞았다.


이게 화근이었다. 보톡스를 맞고 압구정 근처를 좀 배회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지하철에서 나는 기절했다. 아직도 정확히 기억난다. 3호선 압구정을 거쳐 교대에서 2호선으로 갈아탔어어야하는데 이때 기절하느라 남부터미널까지 갔었다. 기절의 순간은 불과 몇 초였는데 눈을 떠보니 지하철 안에 모두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진기한 경험이었다. 내가 쓰러진 자리 바로 앞에 앉으셨던 분이 내게 자기 자리를 양보했다. 하필 쓰러진 자리가 내 앞이라니...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지만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정신이 없어서 감사 인사를 드렸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자리에 앉았을 때 더 재밌는 상황이 발생했다. 내 옆에 앉으셨던 한 아주머니가 자기 가방에 바나나를 꺼내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어디 아파요?"

"아 아니에요."


보톡스 맞아서 이래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때 참,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튼 그 뒤로 수술을 하거나 피를 뽑는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주사 맞는 일을 계속 피해왔다. 물론 보톡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맞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절할 수도 있으니까. 근데 남편의 보톡스 얘기에 나는 같이 가면 되는데 왜 지금까지 같이 갈 생각을 못했는지 통탄스러울 지경이었다.


남편은 자신을 가꾸는 것에 관심이 많다. 머리숱이 풍성한데도 불구하고 조기에 싹을 주며 안된다며 30살이 될 때부터 탈모약을 먹어왔고 아침 헤어 드라이 시간은 15분씩 소요된다. 나중에 어머니와 같이 흉볼 겸 여쭤보니 고등학생 때부터 그랬단다. 그런 남편을 못마땅해하는 나에게 남편이 이런 얘기도 한 적 있다.

"남자는 40대에 뱃살 없고 머리털만 있어도 상위 10%야."


그럼 그런 남편에게 나는 넌지시 물었다.

"상위 10% 남자 되어서 뭐 하려고? 나 죽으면 끝사랑 프로그램 나가려고?"

끝사랑은 얼마 전 방영했던 50,60대 돌싱들의 연애 프로그램이다. 그럼 남편은 지지 않고 받아친다.

"그거 좋네! 그런 프로그램 나가면 너도 하늘에서도 뿌듯할지도 몰라. 내가 이렇게 멋진 남자랑 결혼했었구나~하고"


그런 남편이 이제 보톡스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니. 나에겐 땡큐다. 그래 자기를 가꾸는 게 어디 여자만의 일이겠는가, 남자도 할 수 있다. 아니해야 한다. 한편으론 20대에 만나 30대가 된 우리가 서로의 젊었을 적 모습을 기억한다는 게 장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서로 얼굴을 보며

"너 얼굴 관리 안 하지"

장난 삼아 지적할 수도 있고 또 이렇게 같이 젊게 살 수 있는 해결방법을 찾아나갈 수도 있으니까. 20대 땐 서로 예쁜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했다면 이젠 같이 예쁘게 늙어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편과 보톡스를 맞고 돌아오는 길, 교자집에 들러 점심을 먹는데 남편과의 일화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보톡스 맞은 기념으로... 아니 결혼 700일 기념으로 인생 네 컷 한 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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