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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준혁 Jul 06. 2021

피가 끓었다. 그래서 내 모든 것을 바쳤다.

Chapter 2. 경기 중 - 탈피 脫皮 [세 번째 이야기]

- 피가 끓었다. 그래서 내 모든 것을 바쳤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들 중에 사랑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듯, 나도 주변의 반대와 곱지 않은 시선들과 당면했다.  


 학교에서 누리던 우등생 대우를 서서히 잃어갔다. 책가방에 농구공 하나를 넣고, 실내화 가방에는 아빠를 졸라서 산 멋진 농구화 한 켤레가 들어있었다. 학교에 갈 준비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온갖 학원 교재와 교과서들로 빈 공간 하나 없이 빼곡히 채워져서 등교할 때마다 양쪽 어깨를 짓눌렀던 책가방은 이제 검지 손가락으로 하나만으로 들 수 있는 정도의 무게가 되어버렸다. 그때의 나는 책가방의 무게가 곧 머릿속에 들어가는 지식의 무게이자, 대한민국 학생이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임을 알기에 턱없이 어렸다. 학업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달콤했던 나머지, 사슬처럼 등을 감던 무겁디무거운 천 쪼가리를 비워내는 것은 큰 고민을 수반하지 않았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스스로 밥을 해 먹고 가방은 새로 쌀 필요도 없으니 엄마가 깨기 전에 조심스레 대문 밖을 나섰다. 대문 하나로 나뉜 공간이지만 느낌은 정반대였다. 대문 닫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문을 닫았다. 닫힌 문에서 나는 ‘삐리릭’ 도어록 소리는 나에게 오늘도 자유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면 나는 곧장 농구장으로 뛰어가 볼을 튀겼다.


 매일 아침 드리블 2000개, 레이업 50개, 세트 샷 100개를 성공하고 아침 조회에 들어갔다. 다른 친구들은 일어나서 씻은 지 얼마 안 되어 뽀송뽀송한 상태였지만 나는 아침 9시에 이미 이마에서 땟국물이 흐르는 채로 앉아있었다. 화장실에 비치된 손 씻는 비누로 얼굴을 대충 비비고 휴지에 물을 묻혀 몸 구석구석을 닦았다. 1교시는 온몸에 묻은 젖은 휴지 가루를 떼어내다 보면 끝이 났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쉬는 시간에는 의자에 앉아 다리사이로 드리블 연습을 하다 다음 수업을 알리는 종이 치면 얼른 주간 학습계획표를 보고 다른 반으로 달려가 친구에게 교과서를 빌려 자리에 앉기 일쑤였다. 


 반복하다 보면 어느덧 하교시간. 그때부터는 정말 운동만을 하다, 졸리면 그늘을 찾아 코트 바닥에 누워 자고, 배가 고프면 얼른 컵라면 하나로 요기를 한 다음 다시 공을 튀겼다. 평일 평균 7시간, 주말 평균 12시간. 어쩌면 그때 하루 연습시간은 같은 나이의 전문 엘리트 농구부 소속 선수들보다 길었을지도 모르겠다. 피가 끓을 만큼 하고 싶은 일을 실제로 하고 있는 것에 나는 너무 기뻤고 벅찼다. 프로선수가 되어 관중들과 호흡할 생각만 하루 종일 하다 잠에 들었다. 아침에 너무 피곤해서 더 자고 싶을 때는 다시 이 상상을 하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바로 피우는 담배보다 각성효과가 좋았던 이 상상은 3년 동안이나 나를 침대에서 일으켰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농구를 하다 너무 힘들면 이런 생각을 했다.


‘농구를 하기 이전에는 여러 가지 들이 나를 그렇게 옥죄었어도 버텼는데, 
 내 삶이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를 위기도 거뜬히 버텨낸 나인데, 
 내가 이 공놀이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내가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마냥 벅차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를 채찍질했던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 그 어린 나이에 경험했던 심적, 정신적 부담과 압박감이 도움이 되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 정해놓은 계획대로 연습을 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고, 다리가 후들대서 휘청일 정도가 될 때면 잠시 앉아 그 ‘스툴 의자’를 떠올렸다. 그 정신적 고통에 비하면 신체적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스스로 담금질할 수 있는 의지와 정신력이,
 그 시절 아빠의 엄한 교육을 통해 길러진 것은 아닐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사람이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구나. 
 공부로 공부 이외의 것을 배울 수 있구나.’


 너무 힘겨웠던 기억 탓에 인정하기 싫었지만 아빠의 가르침은 옳은 부분이 있었다. 나를 너무나 힘들게 했던 사람이지만, 당근과 채찍을 수없이 바꿔 사용해가며 가르침을 주었던 아빠가 보고 싶었다.

 ‘아 몰라!’ 


 생각을 이만 정리하고 숨을 한 번 크게 쉰 다음 ‘오늘은 자유투 50개만 더 넣고 들어가자’ 하며 다시 공을 잡았다. 그렇게 3년 동안 내 하루들은 저물어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대로 살다가는 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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