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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동 Dec 07. 2022

지층: 강아지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친구네 집 강아지 오차가 집을 나갔다.


토요일 저녁 오차를 집에 두고 잠시 외출한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문은 열려 있었고, 오차는 집에 없었다.





*



오차는 걸쇠가 고장난 문틈을 밀고 집을 나갔다.


친구가 살고 있는 언덕 위의 오래된 아파트 뒤쪽으로는 동네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는 나지막한 산 두 개가 있고, 그 아래로 내려오면 도심이다. 오차는 이 두 개의 산에서 자주 산책을 했고, 그래서 우리는 오차가 여기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술을 마시고 있던 나와 내 여자친구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무작정 아파트 근처로 걸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산을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눈을 크게 뜨고 산 주변을 돌았다.



다음날 친구와 그의 여자친구는 전단지를 뽑아 두 산의 등산로 초입, 갈림길, 동네 주변에 붙였고, 문을 연 가게마다 들러 혹시 오차를 보면 연락을 주시라 부탁했다. 나와 함께 사는 메론이가 집을 나갔을 때 큰 도움이 되었던 각종 동네 커뮤니티와 앱에도 게시물을 올렸다.


나와 내 여자친구는 산을 올랐다. 등산길이 갈라지는 길목마다 친구가 먼저 붙이고 간 전단지를 확인했다. 사람이 잘 가지 않는 길들도 풀을 헤치고 확인하며 오차를 불렀다.



만약 오차가 도심으로 내려온 것이라면 사람들에게 진작 연락이 왔었을 거란 전제를 가지고, 우리 네 명은 산 입구에서 만나 각 등산로로 흩어졌다 모였다 하며 더 샅샅이 오차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작은 산이라고 해도 사람 네 명이,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길을 중심으로, 아무렇게나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을 강아지 오차를 찾는다는 건 막연하고 난감한 일이었다. 우린 산을 돌며 등산객들과 주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무작정 전단지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다시 해가 저물 무렵, 친구에게 복수의 목격 제보 전화가 왔다. 등산로 초입에 길고양이들을 위해 만들어 둔 쉼터를 서성이며 고양이 사료를 먹으려던 오차를 사람들이 발견한 것이다. 우리는 고양이 쉼터로 달려갔고, 미리 챙겨 온 사료와 강아지가 쓰던 방석, 장난감을 두고 배가 고플 것으로 생각되는 오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날 출근해야 했던 나와 여자친구는 해가 저물 무렵 집으로 돌아왔고, 친구들은 사료가 보이는 자리에 차를 주차하고 오차를 기다렸다.








▲ 오차가 처음 목격된, 길고양이 사료가 있던 장소






우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 오차가 산에서 내려와 사료를 먹고 있다고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친구가 조심스럽게 오차를 불렀지만, 놀란 오차는 허기를 채우려다 말고 다시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쨌거나 한발 가까워졌다. 우리는 어차피 오차를 억지로 잡을 수는 없을 테니 오늘은 들어가 쉬고, 내일 다시 나와서 오차가 물과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전했다. 강아지가 놀라서 위험 요소가 너무 많은 도심 쪽으로 도망쳐 버릴 수도 있고, 대부분의 전문가들의 의견도 집을 나간 강아지들은 한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한 뒤, 포획 성공이 확실할 때 잡기를 시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철수한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고, 다음 날 새벽부터 큰비가 예고되어 있었다.





**



나는 오차가 집을 나가는 것이 일면 예견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은 호기심이 아주 강했고, 오래 된 친구 집 현관문은 그 호기심에 비해 그리 튼튼하지 않았다. 잠금장치도 허술했다. 우리는 여러 번 친구에게 안전 문을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했었다.



친구는 오차가 집을 나갈 리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가더라도 집 문 앞에서 멀리 가지 못할 것이고, 금방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몇 개월 전, 나는 이사 온 집에서 메론이가 허술한 현관문 손잡이를 밀고 집을 나간 경험*을 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그 짧은 경험을 한 이후로 메론이보다는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믿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번 안전 문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참조: 리좀: ‘~이다’와 ‘그리고





***



들뢰즈에게 세상은 흐름과 그 흐름의 절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그에게 철학적인 관점일 뿐 아니라 과학적이고 물리적인, 특히 지질학적인 원리이다. 지질학, 그 넓고 깊은 분야 안에서도 그는 ‘지층’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구는 안에서부터 핵과 맨틀, 지각으로 구분된다. 그 중 우리가 알고 있는 지층은 지구 전체의 1%에 불과한 표면, 지각 부분에 형성된다. 들뢰즈는 지층이 형성되기 이전의 일종의 수프(soup) 상태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흐름으로, 지층을 이 흐름의 절단으로 정의한다.



우리의 기초적인 지구 과학 지식을 통해 이 흐름을 이해해 보자면, 우선 지각과 맨틀이 맞닿는 부분의 연약층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연약층은 높은 온도와 적은 압력을 가진 장소로, 끈적끈적한 액체 상태의 광물과 금속이 흐르는 구간이다. 판 구조론*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구간의 액체적 특성은 판을 움직이도록 하는 조건인 동시에, 무거운 해양판이 가벼운 대륙판과 충돌했을 때 밀려 내려와 녹게 되는 장소이다. 말 그대로 다양한 재료들이 녹아 있는 수프이며,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잠재적 상태이다.



지구는 지각을 형성하고, 충돌에 의해 파괴되며, 녹아서 다시 밀려 올라가 새로운 지각을 형성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엔 이미 충분히 단단한 지각 안에서도 이런 흐름은 계속된다. 연약층과 지각에서 벌어지는 활동이 지구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운동이라면, 지층은 지구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는 운동에 가깝다. 지층을 통해 지층이 형성된 시기의 기후와 생물군 등을 연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다양한 형태의 섞임으로 존재하던 광물이나 금속 등이 어떤 조건들에 의해 으깨어지고 밀려들어 지층을 형성하는 것이다.


수프, 흐름이 생성이라면, 지층은 포획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무궁무진한 잠재성의 상태를 절단하고, 길어 올려 단단하게 굳은 형태로 고정하는 것.








- 막스 에른스트, 〈Terre Écossaise〉









지층은 일반적으로 지질학의 고유한 개념이지만 들뢰즈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생물학, 나아가 추상적인 영역인 언어학이나 화성학으로까지 이를 확장한다. 특정한 형태를 가지고 독자적인 경계를 형성하는 우리의 몸도, 수프 상태로부터 절단되어 길어 올려진 하나의 지층이다. 그것은 유전자 수프일 수도 있고, 우리 몸을 형성하는 물질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앞서 말한 지질학적 수프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땅에서 와서 땅으로 돌아간다!─ .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다양한 목소리의 흐름을 끊어 언어학적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무작위적인 소리를 분절하고 화성을 부여해 음악적인 지층으로 포착해 내기도 한다.


포획과 포착은 이해할 수 없는 질료들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규칙이나 형식을 만든다. 우리는 이 형식을 통해 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어떤 실체들을 만난다. 그러니까 절단을 통해 우리는 실체를 마주한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절단이 오직 이 강렬한 흐름들, 수프들, 연약층, 무작위적인 것처럼 들리는 소리와 목소리들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덧붙이자면 이 흐름은 이미 굳어지고 단단해 보이는 지층의 내부에서도, 다른 지층들과의 사이, 위와 아래, 곁에서도 부단히 그 움직임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도망, 혹은 도주라고 말한다.


지층에 대해 말하는 이 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판 구조론(plate tectonics): 지구의 표면이 딱딱하고 깨어지기 쉬운 여러 개의 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판들이 이동함에 따라 지진, 화산 등 다양한 지질 현상이 발생한다는 이론.





****



안전 문에 대한 믿음, 오차에 대한 믿음……. 우리는 어떤 믿음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 믿음들 없이 삶은 언제나 통제 불능의 상황에 놓인다. 삶에서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들이 얼마나 있겠냐만, 그럴수록 이러저러하게 되리라는 믿음은 그 자체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요건이 된다. 무작위적인 사건들과 사물들에 우리는 이름을 붙이고, 기뻐하거나 슬퍼하고, 구분하고 구획하며 삶을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가족 없는 작은 흰색 강아지는 친구에 의해 오차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오차는 그 친구를 만나 특별한 흰색 강아지가 되었다. 친구의 믿음은 흰색 강아지를 오차라는 이름으로 포획하는 지층이다. 그 믿음 속에서 오차는 도망가지 않는 강아지일 뿐 아니라, 다른 이보단 친구 자신의 말을 듣는 새침한 강아지이고, 사람보단 동족을 더 편하게 느끼는 강아지이다.


오차라는 지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험이 쌓임에 따라 두터워진다. 오차는 정말 그런 강아지가 되겠지만, 때로는 어떤 강렬함에 이끌려 그러한 오차로부터 스스로 도망치기도 한다. 난 그런 도망을 막지 못한 친구가 너무 미웠다.



그러나 도망은 친구의 믿음뿐 아니라 나의 예견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오차가 이튿날 저녁, 제 발로 집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오차가 산에 있음을 확인하고 돌아와 다음날을 위해 잠이 들려던 자정 무렵이었다. 오차는 혹시 돌아올지 모를 자신을 위해 열어 둔 현관문을 긁어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코 위에 모기 물린 흔적과 입 안에 장미 가시 하나가 박힌 것을 제외하면, 좀 지저분해진 채 야생의 씨앗을 주렁주렁 몸에 달고 집에 들어온 것을 제외하면, 오차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힘차게 엉덩이를 흔들며 낑낑댔다고 한다.



내 예견이 빗나간 것은 현관문을 그대로 두면 오차가 언젠가 집을 나갈 것이란 사실 뿐 아니라, 포획하지 않고 오차가 제 발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단 점이다. 난 무엇보다 포획 전문가를 불러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것은 메론이보다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믿었던 나의 지층, 집을 나간 강아지가 끝내 도로 위의 주검으로 돌아오는 일을 지켜본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난 오차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 오차가 돌아온 직후의 모습. 콧잔등에 모기가 물렸다.











*****



도망은 때로 다시금 포획의 대상이 되어 굳어지기도 하지만, 영원한 포획의 불가능성을 시사하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온 오차는 다시금 이전의 오차가 될 수도 있지만, 완전히 다른 오차가 될 수도 있다.



친구는 오차가 돌아온 며칠 뒤 오차가 뛰어넘을 수도, 밀고 나갈 수도 없는 거대한 안전 문을 설치했다. 그건 당연한 조치였고 바라 마지않던 조치였지만, 이상하게도 난 마음속으로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난 한편으로 친구의 믿음이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완전히 다른 국면들을 맞이하면서도, 믿음을 수정해 가며 관계를 맺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안전 문을 설치하고, 목줄을 단단히 메고, 입마개를 씌우는 등 이제는 당연해진 반려인들의 미쁘고 사려 깊은 태도에도 어쩌면 내가 메론이보다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믿는 그것과 같은 무언가가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질문하게 되었다. 오차의 도망이 나에게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내 믿음 역시 조금 다른 생각들로 이어졌다.



집을 나간 메론이와 오차는, 강아지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지층은 삶을 가능하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삶의 가장 큰 역량인 질문하기를 멈추도록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믿음과 질문의 반복.


오차는 무엇으로부터 도주한 것이었을까? 반려인이 없는 집으로부터? 오차라는 이름으로부터? 개라는 종의 일반적인 특성으로부터?



그보다, 오차는 깜깜한 밤 산에서 무엇을 했을까?













글쓴이 김지원(석운동)




‘석운동’이라는 이름의 작업자로, 가구와 공간을 디자인하고 제작합니다. ‘아젠다 2.0’의 공동 편집자를 맡고 있으며, 올해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으면서 내 삶과 주변, 세상을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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