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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수레 Nov 30. 2021

개인주의자의 엄마 표류기

-임신 6개월, 나 말리지 마

임신 6개월, 지금 엄마는?


태동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소화불량 증세가 나타난다.

허리 결림과 요통을 느낄 수 있다.

체중이 임신 전보다 5~6kg 증가한다.


그렇다. 저 말을 요약하자면 앉아있어도 불편하고 누워있어도 불편하고 서 있으면 제일 불편하다는 뜻! 시간은 나를 태우고 임신 20주를 지나 임신 중기를 향해가고 있었다. 임신 초기와 다른 가장 큰 변화라면 태동을 강렬하게 느낀다는 것.. 신체의 변화로 인한 불편함은 말해 무엇하리. 그것 말고 조금은 더 뜻깊고 긍정적인 변화를 찾아보고자 애쓴 결과 그것은 태동인 것으로 결론 내렸다.


뱃속의 아기는 딸꾹질을 참 자주 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라치면 뱃속이 덜컹하고 아이가 딸꾹질을 시작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그 느낌을 알고서는 세상에, 이런 불편함이 추가되다니! 하고 새삼 임신의 민낯을 또 하나 보게 되는 것 같아 약간은 화가 났다. 물론 임신하자마자 증상의 하나하나를 감동으로 느끼는 사람이 대다수겠지만 나라는 인간은 그렇지 못했기에 아기의 딸꾹질이 임신 증상 중 하나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입덧은 중기가 지나도록 계속되는데 그나마 잠을 자야 잊힐 호르몬의 장난인 것을, 딸꾹질이라니!! 그것도 뱃속 1킬로도 안 되는 존재의 딸꾹질로 나의 단잠을 방해받는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남편은 그 와중에 잘도 잤다. 원래도 머리만 닿으면 잘 자는 사람이었다. 자기 말로는 군대에 있을 때 수색대 훈련을 가서 한겨울 아스팔트 위에서도 1등으로 잠들어서 선임에게 눈치 없다고 발길질을 당했다고 하니 입덧하는 아내 정도는 뭐 눈치 볼일도 아닌 것이다. 침대에 누워서 아기의 딸꾹질에 맞춰 흔들리고 있노라니 속은 더 부대껴 오고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루는 잘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 앉혀놓고 "왜 나만 못 자? 왜 나는 못 자는데 너는 코까지 골고 있냐고!!" 하고 대성통곡을 했더랬다. 남편은 어리둥절 한 스푼, 억울함 한 주걱 정도 돼 보였지만 별다른 대응은 하지 않았다. 그냥 잠이 덜 깨 어벙한 채로 "미안.. 미안.."을 읊조리다 다시 잠들었을 뿐.


임신 중기를 지나오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감정은 이게 현실인가? 내가 엄마가 된다고? 아이를 품고 있다고?라는 감정이었다. 임신 초기에는 임신을 확인한 얼떨떨함, 이것저것 검사하고 모두가 얘기해주는 축하와 카더라 하는 주의사항을 듣느라 약간은 피곤한 상태에 나에게 일어난 현실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다. 12주가 지나고 아기의 성별까지 알게 된 후 찬찬히 이 상황을 되짚어 보는 것이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나는 임신을 아주 반갑게 맞이했고 또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임신기간 중 여러 날을 울며 잠들었다. 내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믿을 수 없었고, 또 내가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는 부모가 된다는 사실은 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말고를 떠나서 덜컥 겁이 났다. 이야기 처음에 썼다시피 나는 부모가 되길 바랬지만 또 부모가 될 줄은 몰랐던 사람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고 그 여파는 임신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예민한 몸과 예민한 마음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 그것을 임산부라 부르고 싶다.. 그로 인해 나는 임신기간 동안 남편과 많이도 싸웠다. 일방적으로 화를 내기도 하고 가끔은 맞받아치는 남편과 천둥 같은 다툼을 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어머니를 비롯 시댁 식구들이 나의 둘도 없는 든든한 지원군이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없는 채로 데면데면 지내다 갑자기 임신을 해버린 그 당시엔 시집식구들의 작은 코멘트도 굉장한 상처로 다가왔다. 


속도위반으로 상견례 까지 마친 우리보다 6개월을 앞서 결혼한 시누이가 또 하필 나보다 6개월 빨리 둘째까지 출산하면서 나는 임신기간 내내 막 아이를 낳은 시누이보다는 덜 힘들고 덜 신경 써도 되는 존재로 비춰졌다. (물론 그 당시 내 생각) 그 때문에 가벼운 말 한마디에도 남편에게 그 말에 대한 보상을 하라고 악다구니 지르기도 하고, 시댁에 노골적으로 서운한 마음을 비추기도 했다. 6개월 사이 한 집안에 아기가 둘이나 태어나니 사실 내가 최우선이 아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이미 두 돌이 된 첫째 조카까지 있었으니 우리 어머님은 몸이 두 개라도 바쁠 지경이었다. 


나는 서운한 마음을 느낄 때마다 남편에게 단언했다. 아이를 낳으면 시댁 식구들에게 절대 쉽게 보여주지 않겠노라고. 뱃속에 품고 있을 때 그 누구도 뱃속 아기의 안위를 묻지 않고 나의 기분조차 신경 쓰지 않아 보이는데 나중에라도 아기를 보고 싶다 말이라도 해보라, 가만두지 않을 거다! 하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 당시엔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냥 다 화가 났다. 열 달 동안 입덧하고 피와 살을 나누어 아이를 품고 있다 또 살을 찢는 고통으로 세상에 내보내는 건 나인데 결국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고 우리 부모님에게 외-조부모라는 호칭을 쓰게 되는 그 상황을 말로라도 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갑자기 기쁘다 갑자기 슬프고 또 갑자기 걱정이 밀려오다 또 기절하듯 잠들어버리며 누구보다도 본능적으로 지내던 임신 중기를 지나오며 여러 분노는 작게나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 또한 모두 부질없다는 걸 알았달까. 다소 싱거운 결론이지만 그저 임산부란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 라고 생각하니 만사가 편안해졌다. 


우리집에 처음 발 들인 아기 한방울


아기는 내 마음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모르는 건지 고맙게도 털끝만큼의 문제도 없이 뱃속에서 쑥쑥 자랐다. 딸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남편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양가에 전화를 하고 지인들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나도 물론 기뻤다. 평생 자매를 갖는 것이 첫째 소원, 딸 둘을 낳아 서로의 편이 되게 해주는 것이 두 번째 소원이었는데 그 소원들의 3분의 1 정도는 이룬 기분이었다. 다정다감한 아들도 있고 씩씩한 딸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은 나에게 이제 다정다감한 친구 같은 딸이 생겼다는 안락함을 주었다.


튼살크림을 열심히 바른 보람도 없이 임신 24주 차에 아랫배가 가뭄에 마른논 바닥 갈라지듯 주루룩 트기 시작했다. 튼살의 가려움을 참으며 가끔은 울고 웃던 내 임신은 40주를 향해 느리지만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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